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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어느 간호사의 죽음

등록 2018.02.20 21:45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는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일깨우는 동화를 여럿 남겼습니다. 베스트셀러 '모모'도 도둑맞은 시간을 인간에게 찾아주는 소녀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뭔가를 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무관심해지고, 세상이 낯설어지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게 된다. 화도 감동도 없다…."

프로이덴버거라는 미국 심리치료사는 이런 증상을 간호사들에게서 발견했습니다. 남 돌보는 일을 사명감에서 시작하지만 압박과 피로에 시달리다 에너지가 바닥나 우울과 절망에 빠지는 겁니다.

그는 이 증상을 번아웃(Burn-out) 신드롬이라고 불렀습니다. 탈 대로 다 타 재만 남는 소진(燒盡) 증후군이지요. 그런 간호사들 사이에 '태움 문화'라는 게 있습니다. 선배가 후배를 재가 되도록 혼내고 괴롭히는 걸 말합니다. 일이 서툴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폭언과 폭행,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라고 합니다.

설 전날 어느 대형병원 간호사가 목숨을 끊은 것을 두고 태움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작은 실수를 한 뒤 태움이 두려워 자책했다는 겁니다. 병원 측은 질책이나 괴롭힘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힘들어 여러 번 그만두고 싶다고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간호사들은 '백의의 전사(戰士)'라고 자조할 만큼 격무에 시달립니다. 바쁠 땐 화장실 갈 시간도 없고. 평균 6분 걸리는 식사마저 거르곤 합니다. 태움 문화도 가혹한 업무를 견뎌내야 하는 직업 풍토에서 생겨난 것인지 모릅니다.

'번 아웃'은 일 중독에 걸린 현대인의 직업병입니다. 치료제는 일과 삶의 균형, '워크-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입니다. 업무량과 속도를 조절해 사생활과 여가를 찾으려는 요즘 추세를 가리키지요.

간호사처럼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이라면 자신을 위해서도 환자를 위해서도 균형 잡힌 삶이 더 절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여전히 그 반대의 길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2월 20일 앵커의 시선은 '어느 간호사의 죽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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