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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수첩] "정몽규 회장님, 한국축구 재미 없어 안 본 겁니다"

등록 2018.07.05 19:03

#2018 러시아월드컵 취재에 부쳐
정몽규 회장에게 보내는 고언

오늘 대한축구협회와 축구 기자단 사이에서 긴급 현안 미팅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과 최영일 러시아월드컵 선수단장, 김판곤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 등 지도부가 함께 했습니다. 기자들을 모아놓고 여론의 향방을 살펴보고자 하는 의도였겠죠.

여러 이야기가 돌던 중 이번 월드컵이 유독 인기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정몽규 회장에게 질문이 돌아갔습니다. 정 회장은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이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러시아월드컵과 맞물려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됐고, 지방선거도 있었습니다. 축구 못지않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외부로 시선이 쏠린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독 인기가 없었던 월드컵, 단지 외부 환경 때문만 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월드컵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대표팀 인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표팀 자체에 인기가 없었던 것이죠. 옆 동네 얘기를 꺼내 민망하지만 프로야구는 지난해에 비해 올 시즌 관중이 결코 줄지 않았습니다. 외부 탓으로 돌리기에는 상관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원인은 대표팀에서 찾아야 합니다. 스스로 매력적인 상품이 되지 못했고,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지 않았던 것이죠. 답답한 경기, 재미없는 경기를 누가 보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월드컵을 외면했습니다. 대표팀을 외면했습니다. 외부에서 즐길 거리를 찾았습니다. 대표팀은 세계 최고 리그에서 활약하는 손흥민을 보유하고도 큰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정 회장은 인기가 없었던 이유를 축구판에서 찾았어야 했습니다.

지난 11월 콜롬비아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날 대표팀의 경기는 소위 재밌었습니다. 공격 전환 속도가 매우 빨랐고, 선수들은 슛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보는 내내 시원시원하다는 평가가 뒤따랐습니다. 전방 압박은 좋았고, 수비는 찰거머리 같았습니다. 2골을 넣은 손흥민의 활약으로 강호 콜롬비아를 2-1로 제압했습니다. 신태용호는 이날 경기로 그간 쏟아졌던 비난과 비판을 상당수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대표팀은 최종예선 마지막 2경기(이란·우즈베키스탄)를 수비 위주 전술로 일관해 경기력 논란에 시달렸던 상황이었습니다. 콜롬비아전을 보건대, 팬들은 재밌는 축구에 갈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표팀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핑계거리도 있었습니다.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플랜A가 흔들렸습니다. 실험이 반복됐고, 경기력은 들쑥날쑥했습니다. 부진한 경기가 이어지자 비난의 화살은 선수들을 향했습니다. 마녀사냥식 인신공격과 도를 넘는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우려스러울 정도였죠.

우리 팬들이 실망한 건 '과정'입니다. 최근 올림픽이나 국제대회 경기를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팬들 이제 1등에게만 박수 보내지 않습니다. 패자에게도 따듯한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1등 지상주의를 벗고 약자를 들여다보는 애정과 여유가 생긴 것이죠. 왜일까요. 피땀 흘렸던 선수의 '과정'을 결과와 같이 놓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축구협회는 그러한 과정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단기간의 결과를 쫒기 바빴습니다. 대표팀은 이기는 경기를 해야 했고, 경기력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최종예선 마지막 2경기에서 승점을 따는데 모든 초점을 맞췄습니다. 조급했습니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야 했으니까요. 진출 이후에는 실험으로 바빴습니다. 우리의 색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했습니다. 장점인 스피드는 제대로 활용조차 못했습니다.

점유율을 중시하는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선임은 애초부터 한국 축구와 잘못된 만남이었습니다. 맞지 않는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릇된 선택으로 잃어버린 4년을 보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입니다. 팬들이 실망하고 분노하고 절망한 이유입니다.

비록 러시아월드컵에서 1승2패로 16강 진출에 탈락했지만 다시 축구에 열광하는 건 독일전에서 보여준 '과정' 때문일 것입니다. 선수들의 투지와 투혼을 볼 수 있었고, 엎치락뒤치락 치고받는 경기 내용은 재미까지 더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독일전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축구팬들은 환호하고, 선수들을 따스하게 마중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과정을 좀 살필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뚜렷하고 분명한 한국축구의 색깔, 철학을 정립해야 합니다. 좋은 토양에서 충분한 물과 햇빛을 받아야 달콤한 열매가 열리는 법입니다. 대한축구협회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일선의 지도자와 철학을 공유하고 함께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합니다. 독일전을 통해 갑작스레 그 기회를 맞닥뜨렸습니다. 다시 4년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선수들 입에서 "월드컵이 두렵다"는 말이 나와서도 안 될 일입니다. 축구협회의 무능으로 선수들, 지도자들이 희생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몽규 회장은 안일한 상황 인식을 버리고, 개혁을 펼쳐들어야 합니다. 선수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선수들 뒤에 숨어서는 더욱 안 됩니다. 과정을 살피고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한국 축구에 다시는 미래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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