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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신성일, 20년 동안 정상을 지킨 '영화계의 큰 별'

등록 2018.11.04 19:10

수정 2018.11.04 19:18

[앵커]
신성일 씨 불과 한 달 전 행사에서 건강해 보여서 사망소식이 급작스럽게 느껴져요?

[기자]
신성일 씨는 마지막 공식행사는 지난 10월 5일 부산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행사였습니다. 사진이나 영상에서는 밝은 모습이었지만 그때도 통증이 상당했을 텐데, 워낙에 자존심도 강하셨고, 낫고자 하는 의지도 강해서 주변사람들에게는 아프지 않은 척, 낫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셨다고 해요. 그런데,그때 신성일 씨를 만난 영화인들은 당시에도 얼굴이 굉장히 창백했고, 눈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그 이후에 거동도 힘들 만큼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됐는데요. 3일 전부터 거의 의식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마지막 영화를 만들고 싶다, 시나리오를 거의 탈고했다"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셨다고 합니다.

[앵커]
빈소도 다녀왔죠? 유가족의 슬픔이 굉장히 클 것 같아요.

[기자]
빈소에 직접 찾아가서 유족들을 만났습니다. 엄앵란 씨는 자리에 잘 서 있지 못할 만큼 힘든 모습이 역력했고요. 미국에 살고 있는 첫째 딸도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해서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곁을 지켰습니다. 미국에 있는 사위는 내일 귀국해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졌어요. 또 아내와 함께 경북 영천으로 내려가 아버지 곁을 지켰던 강석현 씨와 차녀 강수화 씨도 상주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습니다.

[앵커]
사실 부부는 서로를 동지라고 부를 만큼 영화인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기자]
부부가 함께 살았던 세월보다 떨어져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신성일 씨는 경북 영천에서 엄앵란 씨는 서울에서 각각 생활했는데요. 하지만 서로 큰 일이 닥쳤을 때는 곁을 지켜주는 끈끈한 부부애를 보였어요. 엄앵란 씨가 유방암 수술을 했을 때 신성일 씨가 서울로 올라와서 함께 생활을 했고요. 또, 신성일 씨가 투병생활을 할 때는 엄앵란 씨가 곁을 지켰는데요. "절대로 남편의 마지막을 초라하게 보내지 않겠다. 죽을 때까지 VVIP 특실에서 대우받고 돌아가셔야 할 것이다" 라며 끝까지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고. 또 신성일 씨도 "수고했다, 고맙고 미안하다"라며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앵커]
신성일 씨는 어떤 영화인이었습니까?

[기자]
출연 영화 524편, 감독으로는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총 535편의 필모그래피를 자랑합니다. 세계 영화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고요. 한국 영화 사상 이렇게 장기간 스타 지위를 누린 배우가 있을까 싶은데요.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20년 정상을 지킨 거의 유일한 배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영화계에서 큰 별로 불리는 이유는 인품 때문입니다.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영화계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하셨고요. 또 영화 관계자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등 영화와 관련된 모든 일에 생을 바쳤던 분이었습니다.

[앵커]
유감스러운 건 어제 고인의 사망 오보가 쏟아졌어요.

[기자]
신성일 씨가 한 요양병원에서 지내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전남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통보를 받았고, 그때 가족들이 논의를 했나봐요. 그래서 장례를 서울에서 치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결론을 내려졌고, 아들 강석현 씨가 서울의 한 병원 장례식장을 예약하면서 그게 보도로 이어졌던 겁니다. 잘못된 기사가 처음 보도된 게 7시 10분 정도였고, 그 이후에 한 시간여 동안 TV, 인터넷 등 수백 개의 매체가 별세라는 성급한 보도를 해서 유가족들이 크게 상심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언론들의 성급한 보도문화를 돌아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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