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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저 영부인인데요…'

등록 2018.12.04 21:46

수정 2018.12.04 21:51

김수환 추기경은 생일이나 축일을 맞은 신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축하했습니다. 어느날 "추기경입니다" 라고 운을 떼자 대뜸 이런 대꾸가 돌아왔습니다. "네가 추기경이면 나는 교황이다." 명절에 택배업체가 청와대에서 선물을 보낸다고 알려주면 "사기 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노벨위원회가 저명한 학자, 문인들에게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통보하면 전화를 끊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하지요.

그런데 요즘 황당한 보이스 피싱 사기 사건을 보면 교수, 변호사 기자같이 세상 물정에 훤할 것 같은 사람이 걸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지닌 욕망과 불안을 교묘하게 파고들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작년 말 윤장현 당시 광주시장은 권양숙 여사를 사칭한 여자에게 4억5천만원을 송금하는 전화 사기를 당했습니다. 경찰이 처음에는 윤 전 시장을 피해자로 보고 수사를 했는데, 갑자기 피의자로 전환했습니다. 돈을 보낸 데 그치지 않고 사기범의 자녀 취업에 관여한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윤 전 시장은 전화까지 걸어서 확인했는데 사기범의 목소리가 권 여사와 똑같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대출까지 받아 거액을 건넸는지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는 지방선거 공천을 앞둔 때였습니다. 윤 전 시장은 시장 재선을 위해서 공천을 받아야 하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고, 그런 분위기를 권여사를 사칭한 사기범이 파고든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하게 만듭니다. 윤 전 시장의 욕망과 불안을 사기범이 간파하고 있었다는 분석입니다. 

영화 '스팅'의 교범이 된 책 '빅콘 게임'에서 한 사기꾼은 "고지식한 사람을 속이는 게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편법에 한눈 팔지 않고 묵묵히 곧이 곧대로 사는 사람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전 영부인 사칭사건은 어엿한 광역시장까지 허망하게 말려들었다는 놀라움 뿐 아니라, 그 이면에 우리 정치의 후진성이 미묘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12월 4일 앵커의 시선은 '저 영부인 인데요…'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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