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뉴스전체

[취재후 Talk]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뿔테안경도 녹아내렸다

등록 2019.04.12 11:24

수정 2019.04.12 17:16

[취재후 Talk]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뿔테안경도 녹아내렸다

 

"전쟁이 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지난 4일을 떠올리면, 1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공포를 느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날은 아침부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불어서, 제발 산불만 나지 말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지만 "나쁜 예감을 항상 틀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인제에서 산불이 났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강원도 담당 기자는 폭설과 산불, 태풍은 반 전문가라고 말할 정도로 이런 재난상황에는 익숙한 터라, 여느때와 같이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인제 산불 취재를 마치고, 다음날 취재를 위해 숙소로 돌아가던 길. 고성에서 산불이 났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아. 오늘은 두탕을 뛰는 구나.

이런 마음으로 고성으로 향하는 길.

미시령 터널을 지나, 현장에 도착하자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산능선에는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고, 태풍처럼 몰아치는 불 바람과 뿌연 연기가 날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부장에게 전화해 산불 상황을 알리자, "위험한 곳은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네." 라고 대답했지만. 차마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다라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취재후 Talk]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뿔테안경도 녹아내렸다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린 안경을 임시로 절연테이프로 붙이고 있는 모습


불길을 따라 마을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내려오자, 상황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재가 날려 눈을 도저히 뜰 수 조차 없었습니다.

온 사방이 뜨거운 열기와 불꽃이 몰아치면서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그래도 기자란 사명감으로 불 붙은 건물 앞으로 가자, '툭' 안경이 떨어졌습니다.

뜨거운 열기에 플라스틱 안경테가 녹아내린겁니다. 급박한 상황에 안경을 쓰지도 못한채 취재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연은 어디에도 말하기도 부끄러운 사연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도심까지 산불이 옮겨 붙으면서 전쟁터나 다름 없는 아비규환 상태였습니다.

한꺼번에 나온 주민과 차량이 도로변에 쏟아져 나왔고, 곳곳에서 '펑펑' 굉음을 내며 불기둥이올라왔습니다.

LPG 가스 충전소 앞까지 불이 붙은 현장에 다가갔을 때는 폭발로 인해 불길이 나한테까지 몰아칠까 몸서리 쳤습니다.

코 앞에서 불을 끄고 있는 소방관 뒤에서 10m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불 앞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불을 끄는 소방관 모습에 다시 한번 존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도 공포에 떨었습니다. 뉴스에 다 나가지 못했지만, 자신이 살던 아파트 앞까지 불길이 번지고, 가게 앞으로 불길이 내려오는 모습에 "마치 전쟁이 난 것 같다"는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지옥같은 밤이 지나고, 본격적인 진화가 시작됐지만 상황은 더욱 참담했습니다. 도심 전체가 매캐한 냄새로 코를 찔렀로, 아름다운 경관은 검은 잿더미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대문, 지붕, 전깃줄, 장독대, 가재도구 어느것 하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한 마을에서 함께 살던 김동섭씨 형제들은 두 가족이 한번에 집을 잃었습니다.

불에 탄 소들은 거친 숨을 쉬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애완동물도 지쳐있었습니다. 일년치 곡식도 타버렸고, 볍씨까지 모두 타면서 일년 농사도 망쳤습니다.

 

[취재후 Talk]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뿔테안경도 녹아내렸다
안경없이 인터뷰 하는 모습


그래도 희망은 있었습니다. 맨몸으로 대피한 이재민들은 집은 잃었지만, 가족들이 무사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안도했습니다.

이재민 대피소에는 온정이 이어졌고, 나보다 주변 주민과 이웃을 배려하는 이재민 모습에 강원도의 정을 한없이 느꼈습니다.

시민정신도 빛났습니다. 학교와 마을, 지키기 위해 소방관과 산림청, 경찰, 마을 주민, 교육청 등 숨은 노력으로 인명피해는 적었습니다.

가장 빛났던 대피는 강원진로교육원에서 체험을 하던 춘천 봄내중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산불이 순식간에 번지자, 인솔 교사 11명은 자신보다 학생 168명을 먼저 챙겼습니다. 불길이 내려오는 것을 수시로 파악해, 학생들을 안정시키고 발빠른 대피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진로교육원에선 안전한 대피장소를 수배했습니다. 인솔교사들은 학교에서 교육한 것처럼 아이들은 대피시켰습니다.

일부 교사들은 혹시 빠져 나오지 못한이가 있는지, 불이 내려오는 시설로 돌아가기까지 했습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시설 피해가 났지만 사상자는 2명으로 적었던 이유입니다.

화마가 입힌 상처가 컸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포에 산불이었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희망과 배려, 용기, 기지 역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었습니다. /이승훈 기자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