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이제는 동시(童詩)에까지

등록 2019.05.16 21:47

수정 2019.05.17 14:51

"곤히 잠든 나를 깨우지 말라. 하루 온종일 산비탈 감자밭을 다 쑤셔놓았다…"

한국인의 맑은 영혼을 영롱한 토속어로 노래했던 시인 백석이 북한에서 쓴 동시 '멧돼지' 입니다. 감자밭을 들쑤셔놓고 잠든 멧돼지가 쟁기 끄는 악몽을 꾼다는 이야기가 재치 있습니다.

백석은 광복 후 "가족과 고향을 버릴 수 없다"며 평북 정주에 남았습니다. "더러운 정치 글은 쓰지 않겠다"며 동시와 번역에만 매달렸습니다. 1957년 '멧돼지'를 비롯한 그의 동시들이 "아동에게 말하는 정치적 의미가 없다"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동시는 계급이 아니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맞섰다가 반동으로 몰렸고 삼수갑산 협동농장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40년 가까이 양치기로 살다 떠났습니다.

어제 공개된 북한의 어린이-청소년 시집에 이런 동시들이 실렸습니다. "어제는 대륙간 탄도 로케트, 오늘은 수수탄 꽝 꽈르릉. 아무리 제재와 압박을 해도, 불벼락에 몽땅 타 죽고 말걸" "구린내 나는 그 얼굴(XX) 들이밀 땐, 미국땅이 통째로 없어질 줄을!" 북한이 어린이들을 살벌한 반미 놀이에 동원하는 건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동시까지 욕설과 저주로 가득한 건 새로운 충격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서는 "겁에 질린 개처럼 짖어대는 늙다리. 미친개에겐 몽둥이 찜질이 명약"이라고 했습니다. 급기야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조롱합니다. "우리 집의 삽살개, 하루종일 졸졸 나만 따른다지만… 제 죽을 줄 모르고 승냥이만 따르네… " 지하에 잠든 백석이 이런 동시들을 읽는다면 탄식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 더 주목할 건 이 시집은 남북, 미북 관계가 좋았던 작년에 나왔다는 점입니다. 겉다르고 속 다른 북한의 이중성이 여기서도 잘 드러난 셈이지요. 엊그제도 북한은 쌀을 지원하겠다는 우리 정부를 항해 "시시껄렁한 물물거래로 호들갑"을 떤다고 했습니다. 공산국가 특유의 허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우리가 약점이라도 단단히 잡힌 건지 혀를 찰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까지 흐물흐물하게 보였는데 과연 제대로 된 평화가 찾아올지 오늘 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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