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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Talk] 이해진과 '동일인', 불편한 동거

등록 2019.06.24 15:36

수정 2019.06.24 17:09

"이해진이 나타났다."

2017년 8월 14일 월요일 오후 2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정부세종청사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더 놀라운 건 목적지가 공정거래위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날 그의 공정위 방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네이버의 동일인이 아닙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5월 대기업의 동일인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동일인이 뭐길래,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까지 공정위로 직접 오게 만들었을까요.

 

[취재후 Talk] 이해진과 '동일인', 불편한 동거
당시 대기업기업집단을 지정하는 공정거래위원회


■ '동일인'을 지정하다
때는 1986년, 정부는 대기업이 다른 회사에 출자할 수 있는 총액제한, 그리고 계열회사끼리 직접 출자를 금지하는 규제를 도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A회사가 B회사로 출자한다고 할 때 계열회사에 포함되냐 마냐 하는 것을 판단해야 하는데, 기준점을 어디로 잡을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동일인'입니다.

쉽게 정부가 인정한 '대기업 총수'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당시 네이버도 자산규모가 5조를 넘으면서 대기업 집단 중 공시대상기업집단에 속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동일인을 누구로 할 것이냐가 쟁점이었습니다. 시행령에는 동일인을 '당해 대규모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이'라고 써놓았죠. 공정위가 이해진 GIO를 동일인으로 지정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를 막고자 직접 공정위를 방문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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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인으로 지정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 어차피 네이버 동일인은 이해진
한달쯤 뒤, 결국 공정위는 네이버 동일인으로 이해진 GIO을 지정합니다. 당시 이해진 GIO의 네이버 지분은 4.64%로 적었고, 의장직에서도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정위는 지분 1% 미만의 소액주주가 절반을 넘는 상황에서 이해진 GIO 지분은 유의미하고, 시행령에 쓴대로 네이버를 '사실상 지배하는' 요건에 해당된다고 지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러면 그는 왜 동일인 지정을 꺼렸을까요. 우선 없던 규제를 받기 때문이죠. 이 때부터 네이버는 대규모 내부거래를 공지해야 했고, 이해진 GIO를 기준으로 일정 비율 이상 지분을 갖고 계열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네이버가 해외진출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기업 총수'라는 지위가 자칫 부정적으로 비칠까 우려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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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동일인을 지정하는 공정거래위원회


■ 동일인 지정, 낡은 규제인가
대기업들은 동일인 지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전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이상한 규제다."

당연합니다. 자식에게 대기업을 물려주는 재벌이 전세계에서 유독 우리나라에 많이 있기 때문이죠. 미국처럼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물려준다면 이 제도도 필요가 없는 것이죠. 이사회나 주주총회가 있다고 항변하지만 거수기 역할만 한다고 비판 받아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제도가 완전무결하진 않습니다. 이 제도를 적용하는 순간부터 공정거래법을 시작해서 38개 가량의 법 규제가 시작됩니다. 기업 활동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만들어질 때부터 상호출자 우려가 없는 IT벤처기업엔 맞지 않는 규제라도 비판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동일인의 개념도 '사실상 지배하는'으로 모호합니다.

■ 촘촘한 규제 고민할 때
만약 지배구조가 투명하다면 이런 규제는 필요없습니다. 당초 이 법이 대기업 총수의 전횡이나 일감 몰아주기, 문어발식 확장 등을 막기 위해 생겨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배구조가 깨끗하고 투명하다면 동일인을 총수가 아닌 법인으로 지정하는 데에 보다 적극적이거나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실제 KT(동일인 : KT), 포스코(동일인 : 포스코)처럼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한 사례를 참고할 수 있는 것이죠.

올해도 역시 한진그룹의 동일인을 누구로 할 것이냐에 많은 관심이 쏠렸습니다. 지분율과 경영활동 등과 관련된 많은 분석기사가 쏟아졌지만 결국 공정위가 직권으로 조원태 한진칼 회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했습니다. 지정 요건이 또렷하지 않기 때문에 최종 결정을 내리는 공정위의 입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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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대중 앞에 선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 낯설지 않은 이해진의 작심발언
지난 18일, 이해진 GIO가 5년 만에 대중 앞에 섰습니다. 한 심포지엄에 참석한 것이죠. 이 날 제 귀를 사로잡은 한 문장이 들어왔습니다.

"네이버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내 회사'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네이버 동일인으로 지정된 지 1년 9개월 만에 지정 소감을 밝힌 것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글을 적게 만든 문장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동일인 지정이 불편하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한 기업인의 볼멘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볼 때 저 한 문장에 실린 무게는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기업이 나타나고 시장은 변화무쌍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규제도 시대와 시장상황을 잘 살펴서 대응해야 합니다.

내년 5월에도 공정위는 동일인을 지정할 겁니다. 언제까지 이해진과 동일인의 불편한 동거가 이어질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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