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사라져 가는 것들

등록 2019.07.16 21:45

수정 2019.07.17 20:42

이승만 대통령이 대구로 피란 갔던 1950년, 대구 매일신문 사장이 구속됐습니다. 1면 머릿기사에 '이 大統領(대통령)'을 '이 犬統領(견통령)'으로 내보낸 죄였지요. 활자를 일일이 골라내 판을 짜는 활판인쇄 시절, 문선공이 큰 大(대)자 활자 대신, 개 견(犬)자를 잘못 뽑았던 겁니다. 그때부터 신문사와 인쇄소들은 '大統領' (대통령) 활자 셋을 고무줄로 묶어 한 덩어리로 썼습니다.

그 시대 납활자는 쌀과 같았습니다. 수명이 짧아서 몇 번 쓰면 다시 녹여 끊임없이 새 활자를 만들었지요. 황지우 시인이 노래한 1980년대 을지로 인쇄소 풍경에는 냄새가 있습니다.

"말없는 김씨 할아버지가… 활자를 만든다. 불에 납이 녹는다. 타는 기름 냄새."

그리고 활판인쇄 잉크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납니다. 지금은 이 냄새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별로 없습니다만, 묵은 시집에서 종이냄새와 함께 피어올라, 읽는 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바로 그 냄새입니다.

실핏줄처럼 번져난 잉크, 올록볼록한 활자 자국에서는 시심이 만져질 듯합니다. 너무 매끈해서 얌체 같은 디지털 글자는 흉내 낼 수 없는, 아련한 너그러움입니다. 근대 단편문학의 별, 소설가 김유정이 활판인쇄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김유정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 문학촌의 책과인쇄박물관이 지난 3년, 활자를 만들고 뽑고 짜는 공을 들여 그의 단편집 세 권을 펴냈습니다. 김유정 특유의 토속적 언어, 귀에 들리듯 생동하는 표현이 잘 살아나, 책 읽는 맛부터 다를 것 같습니다. 빠르고 효율적인 것만 떠받드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느리지만 따뜻하고, 거칠지만 인간적인 아날로그의 향기를 그리워합니다. 레코드판, 타자기, 우체통, 편지, 만년필 그리고 깎아 쓰는 연필 같은 것 말입니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청년이 아름다운 것도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겁니다. 이렇게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나 혼자 뒤쳐지는 건 아닌가는 불안이 저 역시 일상이 된 지 오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는 시절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가 그립습니다.

7월 16일 앵커의 시선은 '사라져 가는 것들' 이었습니다.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