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그들이 싸우는 이유

등록 2019.09.17 21:48

수정 2019.09.18 20:42

"(미국에서) 오렌지 달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아륀쥐' 이러니까 '아, 아륀쥐' 이러면서 가져오거든요?"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교육정책을 발표하면서 한 얘기입니다. 실용 영어를 강조한 말이었지만 '영어 사대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졌지요. 총리 후보로 유력했던 그는 이 일로 공직의 꿈을 접었습니다.

"다음 역은 동대문운동장입니다. 2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습니다"

이 유창한 지하철 안내방송은 1990년대 대학에서 강의하던 강경화 장관의 목소리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통역을 했을 만큼 영어가 탁월하기로 유명하지요. 그래서인지 장관이 된 뒤 외교관들의 영어 실력을 타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강 장관과 미국 변호사 출신 김현종 안보실 2차장이 외국 호텔 로비에서 영어를 써가며 크게 다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예전 '오렌지 파동'을 생각하면 정부 내 국제화가 눈부시게 발전한 걸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정부 내의 정책 토론이 이 정도로 활발하다는 반증일까요? 유감스럽게도 둘 다 아닙니다.

대통령 순방 때 김 차장이 외교부 직원을 야단치자 강 장관이 "왜 우리 직원에게 소리치느냐"고 맞받으면서 생긴 일입니다. 그런데 강 장관은 차관급 김 차장과 싸운 사실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김현종 차장하고 다투신 적 있죠? 4월에, 있었지요? 대통령 순방 계기에?"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 갈등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김 차장이 외교부 업무에 관여하고 지시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고 합니다. 그 바탕에는 외교정책 주도권이 청와대로 쏠리면서 빚어진 이른바 '외교부 패싱'이 깔려 있습니다. 

일각에선 서열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합니다만, 진짜 문제는 그런 역학구조에서 나온 외교 성적표일 겁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 일 중 러 4강 어디와도 가깝지 않은 적이 우리 외교사에 언제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외교의 제1 목표는 국익입니다.

한국말로 싸우든 영어로 싸우든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이 와중에 국익이 훼손되고 냉정한 외교와 안보 현실을 정치가 재단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일 따름입니다.

9월 17일 앵커의 시선은 '그들이 싸우는 이유'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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