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샘터, 마르다

등록 2019.10.31 21:47

수정 2019.10.31 21:52

서울 구반포 아파트를 빙 둘러 한강으로 흐르는 반포천 따라 숲이 우거진 산책로가 있습니다. 그 길목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 동상 수필가 피천득입니다. 아흔일곱에 세상을 뜨기까지 구반포 아파트에 살며 주옥같은 글을 남겼지요. 그의 집을 무시로 드나들며 안부를 여쭈고 대중탕에서 등을 밀어드렸던 사람이 샘터사 김성구 대표입니다.

김 대표는 초등학생 때 아버지 김재순 전 국회의장을 따라 세배를 간 이래 피천득 선생을 친할아버지처럼 따르고 모셨습니다. 그런 정성을 기울여 월간 샘터는 기라성 같은 글쟁이들의 원고를 받아 실었습니다. 피천득 선생을 비롯해 법정스님, 소설가 최인호, 이해인 수녀, 장영희 교수가 단골 필자였지요. 장욱진 천경자 이종상 같은 대가들도 기꺼이 표지와 삽화를 그려줬습니다.

시인 박인환은 명시 '목마와 숙녀'에서 "인생은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처음엔 산뜻하지만 곧 빛이 바래는 대중잡지 표지같이 인생도 덧없다는 넋두리였지요. 하지만 한 권의 수필집처럼 책장에 꽂아두고 싶은 교양잡지도 있습니다. 월간 샘터가 그런 잡지의 대명사였습니다.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1970년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로 창간해 한때는 50만부까지 찍으며 사랑을 받았습니다. 법정스님은 '산방한담'을 16년 동안 연재했고, 최인호씨는 일기장 같은 소설 '가족'을 35년이나 이어 갔습니다.

동화작가 정채봉, 시인 강은교 정호승, 소설가 김승옥 윤후명 그리고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이 샘터에서 일하며 글을 썼습니다. 명사들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도 샘물처럼 차고 넘쳤습니다. 이민 간 교민,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도 삶의 애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샘터가 작고 소중한 행복 일깨우는 49년 동안의 속삭임을 멈춘다고 합니다. 갈수록 책을 멀리하는 디지털시대에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 마지막 호를 만들고 있습니다. 무기 휴간이라지만 사실상 폐간이나 다름없습니다.

휴대폰에 익숙한 요즘 세대는 아닐지라도, 오랜 친구를 잃듯 아쉽고 허전한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보통사람들의 삶의 갈증을 축여주던 샘물이 언제든 다시 흐르기를 기다립니다.

10월 31일 앵커의 시선은 '샘터, 마르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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