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탁상 달력을 옮겨 적으며

등록 2019.12.27 21:45

수정 2019.12.27 21:49

하로동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름 화로, 겨울 부채라는 뜻이지요. 당장은 쓸모 없어도 훗날을 생각해 미리 준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 대칭되는 말이 '하선동력' 입니다. 여름 부채, 겨울 달력같이 철 맞춰 하는 인사를 뜻합니다.

그렇듯 누구나 달력을 쉽게 주고받았습니다. 새 달력 챙기기는, 묵은해 보내는 소시민의 해넘이 의례로 말이지요.

4.19세대 시인이 연말 선술집에서 옛 대학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처자식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습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이제 달력이 휴대전화로 들어가는 세상, 달력 인심이 갈수록 박합니다. 그래도 책상에 앉아 한눈에 한 달 살이를 볼 수 있는 탁상달력이 저는 편하고 좋습니다.

그 달력이 마지막 한 장까지 왔습니다. 뒤로 넘겼던 열한 장을 뒤집어 봅니다. 갖은 약속과 집안 기념일, 잊어버릴까봐 청첩장 받자마자 써둔 혼사들, 가고 싶고 곳과 하고 싶었던 일들…. 그 중에 몇을 숙제처럼 새 달력에 옮겨 적으며 저무는 한 해를 돌아봅니다.

새해 새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또 다른 새해가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낯 뜨거운 실수와 뼈아픈 실패가 줄지어 떠오릅니다. 사는 일의 고달픔과 살아온 날의 후회가 찌든 먼지처럼 쌓입니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평생을 무소유로 산 시인, 공초 오상순은 친구와 문인들을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그 말을 시인 구상이 시로 썼습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묶여 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옛말에 행복은 남의 집 마당에서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당연한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세밑입니다.

12월 27일 앵커의 시선은 '탁상 달력을 옮겨 적으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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