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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아카데미에 휘몰아친 폭풍

등록 2020.02.10 21:49

수정 2020.02.10 21:58

가난하고 남루하던 시절, 할리우드를 꿈꾸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빠져, 언젠가는 누추한 현실을 벗어나 저 멋진 곳으로 가리라 맘먹곤 했습니다. 소설가 안정효는 자신을 포함한 그 시절 아이들을 '할리우드 키드' 라고 불렀습니다.

"커서 뭐가 돼 있을까? 너는 감독, 나는 배우?" "난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를 할 거야…"

봉준호는 그보다 한 두 세대 뒤 '충무로 키드' 였습니다. 기름기 흐르는 할리우드 상업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봉준호도 열 살 무렵부터 미군방송 AFKN으로 영화를 보며 꿈을 키웠습니다. 몰래 봤던 야하고 거친 영화들이 알고 보니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드 팔마 작품이더라고 했습니다.

영상만 보고 멋대로 이야기를 짜보면서 영화적 세포를 키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틴 스코세이지 앞에서 오스카를 거머쥐었습니다.

"제가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를 보면서 공부했던 사람인데 같이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시상식에 앞서 레드카펫에 선 봉준호를 가리켜 사회자는 "여기 폭풍이 와 있다"고 했고 정말 거센 폭풍이 할리우드를 휘몰아쳤습니다. 아카데미는 늘 예술과 상업 사이를 얄밉도록 교묘하게 걷다 대중적 상업영화로 기울곤 했습니다. 열에 아홉이 백인인 투표단은 영어를 쓰지 않는 영화, 특히 아시아 영화에 인색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한국 영화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모두를 빨아들이는 봉준호 영화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시아 영화에 작품 감독 각본상까지 몰아주며 스스로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로컬 영화제"라고 꼬집은 봉준호에게 화답이라도 하듯 거듭났습니다. 그 중심에 거장 봉준호가 우뚝 섰습니다.

한국인의 영화 사랑은 특별합니다. 한 해 극장 관객 2억명을 벌써 7년째 넘기고 있습니다. 어두운 좌석에 몸을 묻고서 영화와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에게 봉준호가 오늘 최고의 보답을 했습니다. 이제 노년이 된 옛 '할리우드 키드'부터 어린 '충무로 키드'까지 온 국민에게 소름 돋는 기쁨과 자랑과 꿈을 선물했습니다.

2월 10일 앵커의 시선은 '아카데미에 휘몰아친 폭풍'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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