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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부산시장이 떠난 자리

등록 2020.05.06 21:50

수정 2020.05.06 21:57

제주도 사람들이 한라산 산신제를 모시는 산천단입니다. 그런데 백록담이 아니라 한라산 초입 솔밭에 있습니다. 550년 전 제주목사 이약동이 눈보라 속에 백성들이 제물을 지고 백록담에 오르다 숨지는 것을 보고 여기로 옮겼다고 하지요.

역사는 그가 베푼 선정보다 물러날 때 처신을 더 값지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손에 쥔 가죽채찍마저 "제주 물건"이라며 관아 문루에 걸어두고 떠났습니다. 바다를 건널 때는 배가 요동치자 "내 행장에 떳떳치 못한 물건이 없거늘 누가 나를 욕되게 했느냐"고 호통 쳤습니다. 짐을 뒤졌더니 부하들이 선물로 넣어둔 갑옷 한 벌이 나왔고, 갑옷을 물에 던지자 풍랑이 그쳤다고 합니다. 제주 사람들은 그가 남긴 채찍이 낡아 스러지도록 문루에 걸어뒀고 나중에는 그림으로 그려 기렸습니다.

십몇 년 전 어느 시청이 퇴임 시장에게 관사 집기 반환공문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시장이 떠나면서 가구 카펫 세탁기 다리미에 비데까지, 시 예산으로 산 2천만원어치를 실어갔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부산시장 관사는 정반대 형편입니다. 오거돈 시장이 물러난 지 열사흘이 되도록 개인 짐도 옮기지 않은 채 방치해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사퇴 직후 거제도로 떠나 지인이 영업을 중단한 펜션에 머물다 그제 취재진에게 목격됐습니다.

"오 시장님,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예요?"

그는 "사람 잘못 봤다"며 또 종적을 감췄습니다.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 제2 도시를 이끌던 대표적 지자체 수장이 맞나 싶습니다. 비록 추문으로 물러나긴 했어도 해야 할 뒷마무리가 태산 같은 부산 시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관사 짐처럼 행정 인수인계를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용해 핵심 사업과 업무를 맡겼던 정무라인 간부 열다섯 명도 모두 그만둬 공백이 여간 큰 게 아니라고 합니다.

옛 선인들은 나아갈 때보다 물러날 때를 무겁게 여겼습니다. 퇴장의 미학이라는 말도 있듯, 공직자의 사람됨은 머물 때보다 떠난 뒤에 더 잘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 전 시장은 사퇴 기자회견에서 누구보다 부산을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부산에 그리고 340만 부산 시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떠난 뒤의 그의 처신이 더 더욱 그러합니다.

5월 6일 앵커의 시선은 '부산시장이 떠난 자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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