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박지원

등록 2020.07.06 21:52

얼마 전 대통령 연설문을 놓고 논객 진중권씨와 청와대 참모진이 설전을 벌였습니다. 이 때 요절시인 기형도의 빈집이 인용됐습니다. '빈집'에는 짧은 생에 대한 예감 같은 게 드리워 있지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이 남긴 '귀천'은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고별 시일 겁니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김대중 정부 때 '왕 수석'으로 불렸던 박지원 전 의원은 2003년 대북 송금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조지훈의 '낙화'를 읊었습니다. 권력도 때가 되면 진다는 퇴장의 변이었습니다.

하지만 4년 뒤 사면을 받자 "바람에 진 꽃이 햇볕에 다시 핀다"고 했습니다.

칠전팔기 정치인생을 살아온 박 전 의원이 낙선 석 달도 안 돼 국정원장에 기용됐습니다. 인사 발표 때 그가 호명되자 기자들이 탄성을 질렀을 만큼 뜻밖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권을 겨루던 정적이자 '비문' 정치인에게 핵심 권력기관을 맡긴 것은, 지금의 남북관계 교착이 그만큼 버겁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정치 9단 나와 계십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신 박스트라다무스…"

그는 탁월한 정치감각으로 정치 9단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막강한 정보력으로 숱한 각료를 낙마시켜 청문회 저승사자로 불렸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청문회는 어떻게 넘을지도 관심입니다. 국정원장 후보자에게 대북 불법송금은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 같은 것이지요.

박 후보자는 "SNS도 끊고, 정치의 정자도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워낙 능수능란한 정치인이어서 국정원이 정치바람에 휩쓸리는 것 아니냐는 시선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대통령에게 충성하겠다"는 발언 역시 정치 9단 다운 수사적 표현이겠지만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석열 검찰총장 말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됩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인간 박지원은 지금 기회와 시련이 엇갈리는 일대 시험대에 섰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공직이 될지 모르는 국정원장 자리가 그의 인생에 어떻게 기록될 지 이제는 지켜볼 일만 남았습니다.

7월 6일 앵커의 시선은 '박지원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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