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지붕 위의 소

등록 2020.08.11 21:52

할아버지가 40년 세월을 함께한 암소 누렁이의 고삐와 워낭을 풀어줍니다.

"좋은 데 가거라…"

3백만 관객을 울렸던 다큐영화 '워낭소리' 입니다. 할아버지에게 누렁이는 한 식구였습니다. 평생 논밭을 일궈준 누렁이에게 해롭다며 농약도 치지 않았지요.

할머니와 소가 고된 들일을 끝내고 서로 위로하는 풍경을, 시인은 한 폭 수묵화라고 했습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끝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지난해 횡성 어느 축사에서 한밤중 불이 났습니다. 암소가 등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 백 미터 떨어진 주인집으로 탈출해 머리로 마루를 들이받으며 울부짖었습니다.

잠에서 깬 주인은 축사로 달려가 송아지 여덟 마리를 구해냈습니다. 어미소는 새끼들을 살리고 이튿날 숨졌습니다.

섬진강 둑이 터져 마을을 덮쳤던 물이 빠지자 어제 구례에서 소 구출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홍수에 떠내려가다 집과 축사 지붕에 올라타 목숨을 건졌지만 오도가도 못하는 소를 내리느라 크레인까지 동원됐습니다.

가까스로 땅을 밟은 소들은 탈진해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당겨도, 먹이로 유인해도 소용없던 어느 소를 움직인 것은 핏줄이었습니다. 포기한 주인이 죽은 송아지를 끌고 가자 그제서야 새끼를 따라나선 겁니다.

뱃속에 새끼를 품고 지붕으로 피신했던 어미 소는 그 몸으로 이틀을 꼬박 버텼습니다. 그리고 구출된 뒤에야 마음을 놓은 듯 건강한 쌍둥이를 출산했습니다.

소들은 산꼭대기 벼랑에 선 암자에서도 발견됐습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피난 갔다가 이렇게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우보천리 그대로입니다.

유난히 소를 좋아했던 춘원 이광수는 이렇게 소의 덕을 찬미했습니다.

"느리고 부지런함, 유순함, 침묵함. 그리고 일생에 한두 번 노할 때는 그 우렁찬 울음…"

그러면서 "말은 잔소리 많고 까불고, 나귀는 방정맞고 성미 사납다"고 했지요.

우생마사라는 옛말도 있습니다. '홍수에 떠내려가던 소는 살지만 말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헤엄을 잘 치는 말은 제 힘만 믿고 물을 거슬러 오르다 지쳐 죽지만, 소는 물살에 몸을 내맡기고 떠내려가다 물가에 닿는다는 얘기지요.

숫자 많고 힘 세다고 해서 민심의 순리를 거스르고 매사 요란하게 오만을 부리는 우리 인간 세상을 돌아보게 합니다.

8월 11일 앵커의 시선은 '지붕 위의 소'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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