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정도껏 하세요

등록 2020.11.13 21:50

짧은 가을도 끝나가면서 세상이 무채색으로 가라앉는 요즘, 바람아래 해변에 서면 바람이 수상합니다. 안면도 남쪽 이 외진 해변에는, 용이 승천하며 일으킨 큰 바람이 바다 물길을 틀어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옵니다. 그래서인지 널따란 백사장에는 바람이 쓸고 간 무늬만 가득합니다.

안면도에는 꽃지 샛별 드르니 젓개 숭어둠벙같이 유난히 고운 우리말 지명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시적이고 서정적인 이름이 '바람아래'이지요. 바람 위, 풍상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 바람 아래, 풍하는 바람이 불어가는 곳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없이 고요만 눈부신' 바람아래 해변을 거닐며, 시인은 하수상한 시절, '도무지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을 잊어보려 합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무인지경 바람아래 해변에 와서, 바람 없이 넋 놓고 어슬렁거려 본다…"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 '용재총화'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국수를 입속 가득 넣고 쭉쭉 빠는 것을 보면 심신이 떨리고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그렇듯 멀미가 나도록 천박한 소리만 넘쳐나는 세상, 품격 기품 품위라는 말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품격 있는 질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품위가 이 정도면 있는 거죠."
"좀, 정도껏 하십시오!"

오늘은 대통령 비서실장이 또 다시 언성을 높였습니다.

"국민에게 (살인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어디서 가짜뉴스가 나오나 했더니"
"그렇다고 그렇게 반응하면 어떡하나요. 발끈할 일은 아닌 것 같고" 

국정감사 이래 국회에 쏟아지는 말 말 말들은, 요즘 정치판의 품위가 어느 수준인지 되비추는 거울입니다.

"의원님들 살려주십시오 한번 하세요"

석학 움베르토 에코가 남긴 베스트셀러에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이라는 에세이가 있습니다. 뼈 있는 농담으로 풀어낸 이 세상 비평에서 그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방법'을 옛 명언들의 패러디로 열거했습니다.

"너무나 숨막히지 않아요?"
"죽을 맛입니다"
"내 마음은 황무지입니다"

이 중에 요즘 안부에 써먹을만한 대답이 있으십니까. 저는 탐험가 리빙스턴의 이 말에 눈길이 갑니다.

"이제 가망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11월 13일 앵커의 시선은 '정도껏 하세요'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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