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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음지에서 일한다

등록 2022.06.24 21:49

수정 2022.06.24 22:15

코미디 영화에서 조폭이 교생 실습을 나간 첫날, 교실 복도에 구호가 붙어 있습니다. 왈가닥 선생님이 새 학기 첫날, 새 급훈을 내걸고 아이들을 휘어잡습니다.

예전엔 좋은 단어로 짓던 급훈이 요즘엔 톡톡 튑니다. '오! 마이 갓 내신' '쟤 깨워라' '엄마도 아들 자랑 좀 해보자'… 인성보다 공부만 앞세우는 게 안쓰럽기도 합니다만…. 급훈은 대개 담임선생님이 지어 해마다 바뀌지요.

하지만 교훈과 가훈, 사훈은 몇 세대를 가곤 합니다. 시인이 누군가 내다 버린 가훈 '서로 사랑하자'를 보며 생각합니다 "아니다 버린 게 아니다. 사해(四海)가 일가(一家)라고 집 밖에 내다 건 것 일지도 모른다"

이런 시도 있습니다. "행여 인생의 얼레가 뒤엉켜 서울역 노숙인이 될지라도, 신문 이불은 당일 자로 덮자. 덮기 전에 샅샅이 읽자"

어느 환경미화원 가장이 내건 가훈은 간단명료합니다. "인간쓰레기는 되지 말자"

국가정보원이 1년 만에 원훈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1998년 이래 벌써 다섯 번째 변경입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 교체됐고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를 지나며 번번이 바뀌었지요.

청사 앞에 내세우는 국정원의 얼굴이, 담임선생의 급훈처럼 정권과 함께 명멸해온 겁니다. 정권 바뀔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에 덧칠하려 했던 정치와 이념 색의 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번 교체는 원훈을 새긴 '신영복 글씨체'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는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하다 가석방됐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평소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했고, 대선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도 그의 글씨체였습니다. 소주 상표에도 쓰일 만큼 대중적인 서체입니다만, 대북 정보 활동을 하는 국정원의 정체성에 어긋난다는 의견이 끊이지 않았던 겁니다. 문재인 정부 경찰청 행사 때 자주 썼던 것도 논란이 됐지요.

여섯 번째 새 원훈으로는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지은 첫 원훈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직원 설문조사에서도 1위로 꼽혔다고 하지요.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일해야 하는 자신들의 숙명이 잘 와닿기 때문이 아닐까요.

미국 CIA와 영국 MI 식스의 모토는 창설 이래 변함없이 쓰고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국가 정보기관이 정치와 이념의 풍향에 흔들리지 않고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아 한결같이 지켜나가는 것이겠지요. 어떤 원훈이 되었던 이게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6월 24일 앵커의 시선은 '음지에서 일한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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