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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Talk] 한국보다 해외서 '파친코'에 열광하는 이유

등록 2023.01.17 15:28

수정 2023.01.17 15:51

[취재후 Talk] 한국보다 해외서 '파친코'에 열광하는 이유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애플TV 제공

■ 출판계의 신데렐라?

2017년 2월, 한 동양인 여성이 쓴 책이 세계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그해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찬사가 쏟아졌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회복과 연민에 대한 강력한 이야기"라며 극찬했고 뉴욕타임스, BBC, 아마존 등 75개 주요 매체가 뽑은 '올해의 책'이 됐다.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의 서사를 다룬 이민진(54) 작가의 소설 '파친코' 이야기다.

현재 33개국에 출간된 '파친코'는 출판계에 이렇다 할 이력도, 에이전시도 없던 이민진을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렸다. 이민진은 지난해 뉴욕주 작가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국내에서 만해문예대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지난해 애플TV+는 1000억 원을 들여 만든 동명의 드라마를 야심차게 공개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빛나는 배우 윤여정, 한류스타 이민호의 캐스팅도 화제였다.

어제 미국에서 또 하나의 낭보가 날아왔다. '파친코'의 북미 비평가들이 뽑은 크리틱스초이스 최우수 외국어 드라마상 수상. 세계 출판시장에 이어 콘텐츠시장까지 장악한 '파친코'의 수상을 계기로 원작 소설과 드라마를 둘러싼 이유 있는 극찬을 살펴보자.

 

[취재후 Talk] 한국보다 해외서 '파친코'에 열광하는 이유
이민진 작가 장편 소설 '파친코' / 인플루엔셜 제공

■ 10년 쓴 글을 버릴 결단, 30년 집필의 완성

사실 '파친코'의 성공은 하루 아침의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가 무려 30년에 걸쳐 취재하고 집필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민진은 1976년, 7살 때 가족과 미국에 건나간 이민자 1.5 세대이다.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동창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자살한 소년의 이야기는 예일대에서 역사를 공부하던 19세 이민진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자이니치(조선계일본인)'의 존재를 처음 접하고 느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싶은 마음'. 이것이 '파친코'라는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변호사를 관두고 글을 쓰기 시작한 그녀는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다. 일본계 미국인 남편과 4년을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계 일본인을 비롯해 수백명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를 거듭할수록 '역사에 맞선 평범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10년간 써온 초고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쓴 글. 작품 주인공은 재일조선인 3세 남성 '솔로몬'에서 일제시대 부산 영도에서 일본으로 건나간 조선인 여성 '선자'로, 제목은 '모국(Motherland)'에서 '파친코(Pachinko)'로 바뀐다.

철저한 고증과 집요한 취재, 지난한 탈고 끝에 30년 집필의 노력이 마침내 알을 깨고 나왔다.

 

[취재후 Talk] 한국보다 해외서 '파친코'에 열광하는 이유
소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 /지난해 8월 북 토크 현장에서 청중들과 이야기 하고 있다. /인플루엔셜 제공

■ 할리우드가 한국말로 된 드라마를?

파친코는 영어로 '자이니치'를 다룬 첫 소설이다. 이민진 작가는 "재일교포 이야기가 영어로 출판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서 드라마 제작 얘기가 나왔을 때는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191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재일조선인 가족의 이민사. 한국인들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소재였다. 출간 후 무료배포까지 고려할 정도로 소수민족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거란 기대가 없었으니 원작자에게도 할리우드 러브콜은 충격이었다.

이런 파친코를 미국 기술과 자본주의의 상징 '애플'이 미국 드라마로 제작했다. 한국어 대사가 주를 이루고 주연배우들은 토종 한국인이다. 제작진도 한국계 미국인 수 휴(각본), 코고나다·저스틴 전(연출)이 맡았다.

파친코의 수상은 세계 콘텐츠시장에서 흥행보증수표로 떠오른 'K콘텐츠'의 위상 덕분은 아니다. 원작이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이 나오기 전, BTS가 다이너마이트를 부르기도 전에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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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세종대학교 강당 앞. 국내 독자들과 처음 만나는 '파친코' 이민진 작가 북토크에 참석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대기줄. /인플루엔셜 제공

■ '역주행'에 품귀, 서점가 오픈런도

2017년 출간된 파친코는 세계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에선 뒤늦게 주목받는다. 2022년 애플의 드라마 공개로 원작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치솟으면서부터다.

출간 4년 만에 국내 서점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지만 작년 4월, 기존 출판사와의 판권 계약 종료로 한동안 책은 절판됐었다. 역주행으로 수요는 많은데 책이 없으니 중고서점에선 1·2권 세트가 10만원 넘게 팔리는 품귀 현상도 빚어졌다.

지난해 8월, 만해문예대상 수상을 위해 내한한 이민진 작가가 처음 한국 독자들과 만났다. 당시 서점가에서는 생소한 새벽 '오픈런' 풍경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파친코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미 하버드, MIT 등 아이비리그 학생들 앞에 수차례 강연을 해온 그녀의 국내 북토크에는 당시 폭우를 뚫고 2000명 넘는 청년들이 대학 강당을 가득 메웠다.

■ 전쟁을 겪지 못한 'MZ세대'의 열광

선착순 대기순번에 길게 늘어선 대기줄. 지난해 이민진 작가 사인회 취재 당시 가장 놀라웠던 건 작가를 만나려 새벽부터 서점 '오픈런'을 자원한 독자들의 나이였다.

그들은 어렸다. 한국전쟁은 커녕, 88올림픽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청년들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무엇이 이들을 움직였을까? 이 궁금증이 내가 '파친코'를 읽기 시작한 이유이다.

대기번호 2번을 받은 이하은(소피아 리·22세)씨는 이민진 작가를 보려 새벽 4시에 경기도 자택을 나서 오전 7시에 교보문고에 도착했다고 했다. 사인회 시작은 오후 2시였다.

그는 "한국계 캐나다 교포 2세로 이민진 작가의 책을 읽고 부모님과 돌아가신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며 "이민자 2세 여성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이민진은 나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대기표 12번 하업서(20대)씨도 "'파친코' 팬으로 원작 소설과 드라마를 모두 봤다"며 "새벽에 일어나 수원에서부터 찾아왔다"고 했다.

이들을 통해 내가 얻은 답은 '정체성'이었다. 요즘 MZ세대는 데이트 상대를 고를 때도 'MBTI'를 고려할 정도로 개인의 성향과 정체성을 중시한다.

이들은 어떤 시대보다 개방된 시대를 살고 있다. 국가간 문화교류는 활발해졌고 이민과 유학, 여행은 자유로워졌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클릭 한번으로 다양한 문화와 지식을 습득한다. 그래서 MZ는 인종과 성 정체성, 계급에 대한 편견이 가장 적은 세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살면서 개인이 느끼는 문화적, 정서적 정체성의 혼란도 많다. 한 집단에 온전하게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 혼자서는 찾지 못했던 정체성의 해답, 또는 그 혼란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파친코'를 읽으며 얻은게 아닐까?

 

[취재후 Talk] 한국보다 해외서 '파친코'에 열광하는 이유
대학 강당을 가득 메운 독자들과 북토크를 가진 소설 <파친코>의 이민진 작가. /인플루엔셜 제공

■ 회복탄력성

"역사는 우리를 져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이민진 작가는 "역사나 인간관계와 연결고리가 없는 정체성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 조부모님, 또 그분들의 조상과 연결돼 있다. 그들이 겪은 경험과도 연결돼 있다.

"설사 그 경험이 차별과 불공정이더라도 우리는 이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또 이를 '이겨낼 힘' 또한 가졌음을 알았으면 한다" 그녀는 그 힘을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인간은 차별과 소외감에 저항하고 부딪히며 성장한다. 이민자의 경험을 통해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했던 한국인의 이야기로 세계의 마음을 울린 작품. 세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이야기의 힘이 파친코가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파친코'는 청년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는 시험 과목이 아니라 미래의 문제를 풀 열쇠라고.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를 이겨낼 힘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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