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그해 설은 따뜻했네

등록 2023.01.24 21:51

수정 2023.01.24 21:55

한겨울 온돌방에 뒹굴며 여물게 자라던 어린 시절을, 시인이 추억합니다.

"문풍지엔 바람 쌩쌩 불고, 문고리는 쩍쩍 얼고,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매섭게 추웠던 그 시절 문고리를 쥐면,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곤 했지요.

그런데 어는 건, 문고리가 아닙니다. 살갗의 습기가 차가운 쇠붙이에 닿는 순간 어는 것이지요.

장작불을 지핀 아랫목은 절절 끓어도 윗목은 냉골이었습니다. 무거운 솜이불을 턱까지 덮어써도 코끝이 시렸습니다. 머리맡에 둔 자리끼와 책상 위 잉크병이 꽁꽁 얼기도 했지요.

이제 장노년이 되신 분들은, 참 모질게도 춥던 겨울의 추억들을 품고 계실 겁니다.

그래도 개구쟁이들 놀거리는 더 풍성했습니다. 꽁꽁 언 미나리꽝에서 팽이 치고 썰매 지쳤습니다. 제기 차고 연 날렸습니다.

새총 만들어 참새 잡다 시원찮으면, 밤중에 손전등 들고 동네를 돌곤 했습니다. 초가 추녀에 사다리 걸치고 손 디밀어, 곤히 잠든 참새를 낚아챘지요.

요즘 아이들은 윗목 아랫목이 뭔지 잘 모를 겁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게 넉넉해진 데다, 옛날보다 겨울이 짧아졌고, 추위도 한결 누그러진 덕분이지요. 

설 연휴 끝자락을 맹추위가 강타했습니다. 한파경보를 알리는 재난 문자가 어제부터 부산하게 날아들었습니다.

서울에는 '심각 단계' 동파 경보가 발령됐습니다. 여기저기서 수도 계량기와 보일러가 얼어터져, 위아랫목이 따로 없는 냉골 맛을 모처럼 봤습니다.

고향에 갔던 이들이, 추위와 폭설이 닥치기 전 서둘러 돌아오면서, 오늘은 여느 명절 끝보다 고속도로 사정이 나았습니다. 나머지 서울로 역류하던 행렬도 이윽고 잦아들어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자식 손주들로 왁자하던 고향 집들도 적막해졌습니다.

"설 전날 밤, 현관에 빼곡히 모인 신발들. 날이 밝자, 한가위에나 보자며 다 떠나가고, 할머니 털신만 오도카니 남아 있다" 

그 마을엔 지금도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든두 살 할머니 시인의 소박하되 진솔한 절창처럼 말입니다.

"사박사박, 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하얀 눈은 당신의 머리 위에 흰 머리카락으로 내려앉았습니다. 한평생 자식들 키워 뒷바라지하고 이 밤에도 자식 걱정이 눈발처럼 그치지 않는 어머니에게, 훈장처럼 서린 백발입니다. 춥지만 은혜로운 설 끝자락 밤이 깊어갑니다.

1월 24일 앵커의 시선은 '그해 설은 따뜻했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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