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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이야기] 이재명은 성남의 파르테논을 짓고 싶었나

등록 2023.02.01 09:07

수정 2023.02.08 17:22

그리스, 특히 아테네를 방문하면 반드시 보게 되는 건축물이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그래서 유네스코 문양의 밑그림이 된, 파르테논 신전이다. 그리스를 대표하는 유적지이기도 하거니와, 아테네 시내에서는 어디서나 보이는 건축물이기에 보지 않으려 해도 안 볼 수가 없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아테네 이야기] 이재명은 성남의 파르테논을 짓고 싶었나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아크로폴리스. 아레오파고스 위에서 바라본 사진에서는 신전의 현관에 해당하는 프로필리아에 가려 본관에 해당하는 파르테논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에 고대 유적이 많긴 하지만 대부분 기둥 몇 개만 남기고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어 지식과 상상력이 없으면 유적의 맛을 즐길 수 없다. 하지만 파르테논은 비교적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토리니나 미코노스처럼 풍경과 거리의 낭만을 즐기는 목적이 아니라면 관광객의 대부분은 파르테논을 보기 위해 그리스를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이 처음부터 관광지였던 것은 아니다. 아크로폴리스의 1차적인 기능은 요새였다. 멀리서 보면 우뚝 솟은 파르테논의 종교적인 성격이 먼저 떠오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깎아지르면서도 견고하게 지어진 돌벽이 방어 목적으로 지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안전한 공간인 아크로폴리스에 아테네인들은 두 개의 핵심 시설을 건축했다. 하나는 왕궁이요, 하나는 신전이었다. 권력과 종교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지금도 아크로폴리스에 오르면 기둥 하나는 파르테논 신전보다도 훨씬 멋들어진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바로 왕궁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에레크테이온이다. 에레크테이온이라는 이름 자체가 최초의 왕 에렉테우스(하반신은 뱀이었다니, 역사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인물)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왕정은 곧 폐지되고, 귀족정을 거쳐 민주정이 도입되면서 권력의 중심지는 우뚝 선 아크로폴리스에서 시민의 공간 아고라와 프닉스 언덕으로 옮겨진다.

 

[아테네 이야기] 이재명은 성남의 파르테논을 짓고 싶었나
(왼쪽)가까이서 본 아크로폴리스. 출입구를 제외하면 누구도 진입할 수 없는 완벽한 요새로 지어진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에레크테이온. 멋들어진 기둥이 눈에 띄는데, 사실은 모조품이다. 진품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안에 진열돼 있다.


권력이 떠나간 뒤에도 아크로폴리스를 꿋꿋이 지키고 있던 신전은 페르시아의 침공 때 사라지고 만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100만 대군을 휘몰아 쳐들어왔을 때(할리우드 영화 <300>이 바로 이때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아테네인들은 과감하게 도시를 포기하고 살라미스섬으로 피난 가서 바다에서 해전으로 승부를 본다.(이 이야기는 <300>의 속편에서 다뤄진다.) 텅 빈 도시에 들어온 페르시아군은 살라미스에 숨어든 아테네인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의 신전을 불태워버렸다.

아테네는 페르시아군을 무찔렀다. 크세르크세스는 쫓겨나듯 본국으로 철수해버렸다.(사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이 입은 피해는 철수를 결정할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패배 그 자체로 인한 크세르크세스의 심리적 충격이 치명적이었다.) 당대 세계 최강국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테네의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다. 아테네인들은 되찾은 도시를 재건했지만, 불타버린 신전만은 그대로 방치했다. 침략의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광화문 한복판에 있던 중앙청을 허물 때 국내에서 벌어졌던 논란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법하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서기전 447년,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신전 재건을 결정했다. 그 사이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눈치를 보던 그리스의 변방 국가에서 페르시아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해상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당시에도 반대가 많았지만,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영광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재건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전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보러 가는, 파르테논이다.

 

[아테네 이야기] 이재명은 성남의 파르테논을 짓고 싶었나
(왼쪽)페리클레스. 무려 30년동안 집권했던 페리클레스에게도 콤플렉스가 있었다. 길쭉하게 생긴 머리 모양이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모두 투구를 쓴 모습으로만 남아 있다. (오른쪽)페리클레스 당대의 아크로폴리스. 지금도 관광객들은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파르테논을 보려 아테네를 가지만, 2,500년 전 사람들에게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을 보는 일은 경이로움 자체였을 것이다. ‘아테네는 이런 대단한 곳이야’라고 웅변하기 위해 건설한 곳이다.


이 대단한 건축물을 만드는 데에는 당연히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 파르테논 신전 건축비로만 700달란트가 들어갔고, 신전에 모셔진 아테나 여신상 제작에는 더 많은 1,000달란트가 투입됐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결국 완공되지 못한 아크로폴리스의 현관 프로필라이아 건축에는 400달란트가 소요됐다. (700달란트가 어느 정도 돈일지 궁금할 텐데, 개인적으로는 1조 4,000억원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당시 숙련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1드라크마고, 6,000드라크마가 1달란트에 해당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연봉 1억 원 정도 받는 사람을 ‘숙련노동자’라고 했을 때 얻은 계산의 결과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페리클레스는 위험한 선택을 한다. 페르시아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동맹국들에게서 걷어 델로스섬에 보관하고 있던 기금을 아테네로 옮겨왔다. 전쟁 비용으로 걷은 돈을 아테네를 치장하는데 쓴 셈이다. 도의적으로 보면 비난받아 마땅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비판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당당하게 해명했다. “돈은 돈을 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돈 값어치를 하는 사람의 것이오. 아테네는 전쟁 준비를 끝내고, 그리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있소. 남은 돈으로 건물을 지어 도시를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기술을 발전시키면 아테네를 더욱 멋지게 만들 수 있소.”

그래도 ‘쓸데없는 곳에 돈 쓴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사람들이 ‘쓰는’ 건물이 아니라 ‘보는’ 건물이었기에, 보기에 멋질 뿐 쓸모가 없다는 지적은 옳았다.(그리스의 신전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종교시설처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신이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랜드마크치고 쓸모 있는 건축물이 있던가. 오히려 쓸모없을수록 가치를 인정받는 게 랜드마크다. 돈이 아깝다는 사람들에게 페리클레스는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공금이 아니라 내 개인 돈으로 신전을 짓겠습니다. 대신 신전에는 내 이름을 새겨 넣겠습니다.”

 

[아테네 이야기] 이재명은 성남의 파르테논을 짓고 싶었나
(왼쪽)파르테논 신전 내부에 있던 아테나 여신상의 모형. 신상 하나의 제작비가 신전 자체의 건축비보다 더 비쌌던 이유는, 아테나 여신상이 황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른쪽)델로스섬의 사자상.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쓰였던 아폴론 신전 옆에 줄지어 서 있다. 마치 동맹의 금고를 지키는 것처럼.


쓸모와 영광중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택했을까? 당시 아테네가 지지리도 못 사는 처지였다면 당연히 쓸모가 우선이었겠지만, 당대의 아테네는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이었다. 사람들은 영광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페리클레스의 말이 맞았다. 2,500년이 지나서도 그 건축물을 보러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니 말이다.

하지만 돈 문제에는 잡음이 따른다. ‘그리스를 지키고, 남은 돈으로 아테네를 멋지게 만드는 게 뭐가 문제냐’는 항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횡령 의혹이 잇따랐다. 특히 아테나 신상 제작을 맡아 가장 많은 돈을 쓴 페이디아스가 집중 공격 대상이 됐다. 신상을 만들 재료로 준 금 중 일부를 빼돌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페이디아스의 조수 중 한 명이 직접 고발에 나섰기에 누가 봐도 그럴싸한 의혹이었다. 횡령이 사실이라면 페리클레스 자신이 횡령범이 아니더라도 측근인 페이디아스의 잘못만으로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돈 문제가 나오면 ‘아니다’고 백번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30년이나 집권한 페리클레스의 내공이었을까, 아니면 한 수를 둬도 백수 앞을 내다보는 직관 덕분에 30년이나 집권할 수 있었을까. 횡령 사건으로 고발당할지 예견했던 것도 아닐텐데, 페리클레스는 아테나 여신상을 도시의 비상금고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즉, 도시의 재정 상황이 극도로 나빠지면 신상에 사용된 금을 벗겨내 돈으로 바꿀 수 있도록, 그래서 여신상에서 금으로 제작된 부분만 떼어내기 쉽도록 만들도록 지시했던 것이다.(실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막바지에 아테네는 신상의 금을 벗겨내 전쟁 비용을 마련했다.) 페이디아스는 손쉽게 금이 사용된 부분을 신상에서 분리해냈고, 직접 무게를 달아 재료로 받은 금의 양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 냈다. 적어도 돈 문제에 관한 한 파르테논은 페리클레스의 발목을 잡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다른 문제는 있었다. 페이디아스가 아테나 여신상의 방패에 페리클레스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고 해서 ‘불경죄’ 시비가 있었다.)

 

[아테네 이야기] 이재명은 성남의 파르테논을 짓고 싶었나
성남 1공단 부지. 공단 철거는 끝나고 공원화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할 때의 모습이다.


2000년대 초, 성남 구 도심에는 마치 파르테논이 타고 난 자리처럼 흉물로 변해가는 곳이 있었다. 1974년 판자촌을 헐어내고 성남시민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마치 요새로서 기능이 필요 없어진 파르테논처럼 1990년대에 이미 공단으로서 기능을 상실해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던 성남1공단 부지다. 공단 이전을 결정할 당시에는 아파트와 상가를 지을 계획이었지만,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공원으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 목소리를 등에 업고 ‘1공단 공원화’를 공약으로 걸고 성남시장이 당선된 사람이 바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다.

막상 시장이 되긴 했지만, 공원화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기존에 개발을 예정했던 업체와의 소송전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성남시는 돈이 없었다. 그때 이재명 시장에게 돈이 나올 구멍이 보였다. 바로 대장동을 개발하려는 민간업자들이었다. 대장동 개발을 허용해주는 대신 1공단을 공원으로 만드는데 드는 돈을 대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장동 사건의 시작은 바로 이재명 성남시장의 ‘1공단 전면 공원화’ 공약이었던 것이다. 이재명 시장은 실제로 대장동 민간업자에게 돈을 받아 공원화 사업을 진행한다. 이재명 대표 스스로 대장동 민간업자에게서 공원화 사업비용 2,761억 원을 ‘환수’했다고 자랑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공약했던 ‘전면 공원화’가 아닌 ‘일부 공원화’였다. 돌고 돌아 이재명 대표가 성남시장이 되기 전 계획으로 돌아간 셈이다.

이재명 시장이 1공단 공원화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검찰의 공소장에도 등장한다. “나는 1공단의 공원만 만들면 된다. 대장동 개발 사업은 알아서 진행해라.” 이재명 시장이 유동규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에게 했다는 말이다. 1공단 공원화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대장동 민간사업자들이 이익을 얼마나 챙기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유동규 전 본부장은 이재명 시장이 정진상 전 실장과 함께 ‘이명박 하면 청계천이 있는 것처럼, 이재명 하면 1공단 공원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고도 전했다.

남의 돈으로 자신의 치적을 쌓기로 말하면 페리클레스나 이재명 대표나 똑같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여신상의 금붙이 무게를 재서 횡령이 없었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입증했던 페리클레스와 달리, 이재명 대표는 ‘문제될 행동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구체적인 해명을 자꾸만 피한다.

‘모든 정치인의 꿈은 재선’이라는 말이 있다. 다시 당선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치적이 필요하다. 그래서 수많은 국회의원들은 ‘의정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우리 동네에 예산을 얼마나 받아왔느니 등을 열심히 자랑한다. 정치인이 쓰는 돈이란, 결국 남의 돈이기 마련이다. 남의 돈을 쓸 때는 얼마나 잘 썼는지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아테네 이야기] 이재명은 성남의 파르테논을 짓고 싶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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