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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이야기] 권력을 지키려다 그리스를 잃은 아게실라오스

등록 2023.02.08 09:34

수정 2023.02.08 17:21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다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30년 가까이 끌었다지만, 적어도 전쟁 초기에는 실제 전투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해마다 스파르타군이 출동해 아테네를 포위했지만, 포위 기간은 기껏해야 한 달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아테네군이 나가서 싸우지 않는 한 스파르타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테네 농부들이 애써 지은 농작물을 파괴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스파르타군은 몸과 몸이 부딪히는 중무장보병 전쟁에서는 당대 최강이었지만, 성을 무너뜨리는 기술은 없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서기전 5세기 당시에 성곽을 공격하는 방법은, 성안의 사람들이 굶어 죽도록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굶어 죽을 일이 없었다. 성곽이 유일하게 뚫린 곳은 항구 쪽이었다. 하지만 바다는 아테네의 전유물이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식량을 수입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고전 그리스 비극 명작들이 바로 이 전쟁 동안 상연된 것들이다.

 

[아테네 이야기] 권력을 지키려다 그리스를 잃은 아게실라오스
(왼쪽) 아테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성벽의 잔해. '테미스토클레스의 성벽'이라고 불린다.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페르시아를 몰아낸 테미스토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일전에 대비해 아테네를 성곽으로 둘러싸는 작업 또한 벌였다. 스파르타가 내세우는 종전 조건에는 늘 이 성곽의 파괴가 빠지지 않았다. (오른쪽)도자기에 새겨진 중무장보병의 모습. 중무장보병의 위력은 한 명이 아닌 집단이 되었을 때 발휘된다. 한 명이라도 겁에 질려 걸음을 멈추거나 뒷걸음친다면 전열은 무너지고, 중무장보병은 궤멸당하고 만다. 스파르타가 천하무적인 이유는 적과 마주한 순간 물러서지 않는 용기에서 세계 최강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양상을 바꾼 몇 번의 계기가 있었다. 공통점은 스파르타가 스파르타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전쟁에 임했을 때였다. 전쟁을 끝낸 방식 역시 전혀 스파르타답지 않았다. 아테네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여겨진 바다에서 승부를 보는 방식이었다. 그 중심에 리산드로스라는 인물이 있다.

리산드로스는 왕이 아니면서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위인전이 등장하는 유일한 스파르타인이다. 플루타르크는 리산드로스의 출신을 '왕족은 아니지만,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순수한 스파르타 시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가난했다"는 묘사도 뒤따른다. 돈이 너무 없어서 나랏돈으로 먹여 살렸다는 뜻인데, 보통 아버지가 천한 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혼외자인 경우가 많다. 썩 자랑스러운 혈통은 아닐 수도 있겠는데,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가 이런 출신일 때가 자주 있다.

리산드로스의 이름은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은 시칠리아 원정 도중에 스파르타로 망명했던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를 거쳐 아테네로 금의환향한 뒤 맹활약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바로 그 알키비아데스를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아테네 해군을 박살 낸 사람이 리산드로스였다.

 

[아테네 이야기] 권력을 지키려다 그리스를 잃은 아게실라오스
(왼쪽)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는 델피 신전의 사제였다. 그래서 '영웅전'에도 델피 신전의 헌상된 보물에 대한 설명이 자주 등장한다. 델피의 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될 사람도 바로 플루타르코스다. (오른쪽)투키디데스. 장군으로서 실패했지만, 그 덕분에 인류에게 가장 상세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록을 남겨주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쟁의 원인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전쟁의 경과도 시간순으로 성실하게 적어 나가지만 서기전 411년을 끝으로 기록을 멈춘다. 아마도 '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 해서'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이 많다.


스파르타인은 외국인 앞에서 뻣뻣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리산드로스는 스파르타답지 않은 스파르타인이었다. 리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왕자(당시에는 왕의 동생)인 키루스 앞에 납작 엎드렸다. 그 대가로 막대한 재정 지원을 얻어 수병들의 봉급을 올려줬다. 당대의 아테네 해군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가득 찬 시민군이 아니었다. 돈벌이 수단으로 군 복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급료를 더 준다는 말에 기꺼이 스파르타군에 합류했다. 마침내 해군력의 무게중심이 스파르타로 넘어온 순간이었다.

스파르타인은 우직한 원칙주의자로 이름이 높았지만, 리산드로스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원칙을 언제든지 내팽개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지만, 간사한 술수를 쓴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하지만 리산드로스는 개의치 않았다. “사자 가죽이 모자라면 여우 가죽이라도 이어 붙여야죠.” 입으로는 정의를 외쳤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았다. 거짓말이 아예 입에 붙었다. “아이는 주사위로 속이고, 어른은 맹세로 속인다.”

리산드로스는 마침내 아테네를 항복시켰다. 해상을 봉쇄해 아테네 시민들을 굶어 죽도록 만든 결과였다. 과거 아테네의 지배를 받았던 사모스섬에서는 리산드로스를 신처럼 추앙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광의 절정은 쇠락의 시작이기 마련이다. 전쟁이 끝난 마당에 출신도 의심스럽고 사고방식도 스파르타인답지 않은 인물은 더 이상 스파르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리산드로스는 막후에서 아테네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스파르타 본국은 리산드로스의 권력이 더 이상 커지기를 원치 않았다. 리산드로스는 전쟁 중에는 해군 총사령관이었지만, 종전 후에는 그저 왕의 신하일 뿐이었다.

내리막길을 걷던 리산드로스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고,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스파르타에는 왕이 2명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죽었다. 당연히 왕의 아들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에 망명해있는 동안 왕비를 임신시켜 낳은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리산드로스는 왕의 아들 대신에 왕의 동생 아게실라오스를 왕위에 밀어 올렸다. 혹독하기로 악명 높은 스파르타의 유년 교육을 리산드로스와 함께 받은 단짝 친구였다. 아게실라오스는 리산드로스가 다시 날아오르게 해줄 날개였다.

아게실라오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아게실라오스는 야망이 크고 혈기왕성했지만, 한쪽 다리가 조금 짧아서 다리를 절었다. 스파르타에는 신탁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절름발이가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 하지만 리산드로스는 신탁을 오히려 역공의 소재로 삼았다. 선왕의 사생아야말로 혈통에 있어서 절름발이, 신탁이 경고한 절름발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선왕의 아들을 추방하기까지 했다. 아게실라오스는 왕위에 올랐다. 리산드로스가 씌워준 왕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테네 이야기] 권력을 지키려다 그리스를 잃은 아게실라오스
3단 노선.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의 주력 전투선이었다. 평소에는 돛을 달고 다니지만, 전투를 할 때는 돛을 내리고 노의 힘으로만 싸웠다. 주된 전술은 배 하단부의 주걱턱처럼 툭 튀어나온 충각으로 충돌해 적선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전투선의 노 젓는 일이 노예들 담당이었지만, 아테네가 바다를 주름잡을 당시에는 투표권을 가진 자유민이 하는 일이었다. 사진으로 볼때 왼쪽이 앞부분이다.


각축을 벌이던 아테네가 몰락하자 그리스 세계는 스파르타가 유일한 패권국가로 남았다. 하지만 변화는 외부로부터 밀려왔다. 한때는 스파르타의 돈줄 역할을 하던 페르시아가 과거 아테네의 동맹국, 이제는 스파르타의 영향권에 들어온 에게해 연안국을 직접 통치하려 들었다. 이들 도시는 리산드로스가 임명한 사람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리산드로스로서는 국익을 위해서나, 개인의 위신을 위해서나 지켜야 할 땅이었다. ‘절름발이’ 아게실라오스는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에 나선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트로이 원정을 떠날 때 그리스 연합군이 출발했던 아울리스항을 출항지로 선택했다. 자신을 트로이 정벌에 나서는 아가멤논으로 연출한 셈이다.

하지만 막상 바다를 건너 에게해 동부에 도착하자마자 아게실라오스는 자신이 아가멤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 모두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에 바다를 주름잡았던 리산드로스를 떠받들기 바빴다. 주인공은 리산드로스고, 아게실라오스 자신은 리산드로스를 빛내주는 배경처럼 취급받는다고 느꼈다. 권력자가 허수아비 취급받는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아게실라오스는 우선 리산드로스가 내놓는 모든 의견에 반대했다. 리산드로스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불이익이 가해졌다. 왕의 태도 변화를 눈치챈 리산드로스가 특유의 처세술로 몸을 잔뜩 낮췄지만, 아게실라오스에겐 그마저도 거슬렸다. 아게실라오스는 군대의 2인자에게 식탁에서 고기 써는 일을 맡겼다.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참다못한 리산드로스가 항의했다. “친구를 이렇게 모욕할 수 있습니까?” 아게실라오스는 차갑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친구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려고 하잖아.”

아게실라오스는 결국 리산드로스를 본국에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리산드로스의 몫이었던 해군 사령관은 왕비의 동생 피산드로스에게 맡겼다. 해상전투야말로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아게실라오스는 결국 능력보다 인연을 택했다. 아게실라오스는 원래 의리로 유명했다. 한번은 친구를 위해 이런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그 친구가 잘못이 없다면 즉시 풀어주시오. 그 친구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나를 봐서 즉시 풀어주시오.” 하지만 그 의리에는 전략도, 정의도, 감동도 없었다.

리산드로스는 전투도 잘했지만, 그에 앞서 외교 전문가였다. 리산드로스가 아테네 해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페르시아의 자금 지원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리산드로스가 사라지자 페르시아의 자금 지원은 적국이 된 스파르타가 아닌 그리스 본토의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는 나라들로 향했다. 과거 스파르타의 적국이었던 아테네는 물론 한때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던 테베, 코린토스, 아르고스가 '스파르타 타도'를 기치로 내걸고 동맹을 맺었다. 스파르타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이었다. 국내 상황이 더 다급해지자 아게실라오스는 원정군을 철수시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중재로 반란을 진압하고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름하여 ‘왕의 평화’였다. 그리스 본토에서의 평화가 어느덧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아울러 과거 아테네의 영향권에 있었고, 스파르타가 해방시켰던 에게해 주변국들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스의 해방자’라는 구호를 앞세워 아테네 제국을 몰락시켰던 스파르타가 그리스 땅을 페르시아에 팔아먹은 셈이 되고 말았다.

2,500년이나 지났어도 ‘나라 팔아먹은’ 아게실라오스의 오명이 남아 있는데, 당대에는 오죽했을까. 특히나 전쟁 영웅 리산드로스를 내치는 결정이 패착이라는 지적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당시 리산드로스는 테베와의 전투 과정에서 어이없게 이미 죽은 뒤였다. 전쟁 영웅에 어울리지 않는 리산드로스의 죽음이 아게실라오스에게 더욱 불리한 여론을 조성했는지도 모른다. 아게실라오스는 ‘왕의 권력을 탐한 친구’ 리산드로스에게 마지막 응징을 가한다.

리산드로스가 남긴 문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스파르타 왕의 자격을 ‘왕가의 자손’이 아닌 ‘스파르타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확대하자고 제안하는 호소문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리산드로스 자신이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게실라오스는 결국 스파르타를 빛낸 영웅을 반역자로 만들고서야 직성이 풀렸던 셈이다.(註: 리산드로스가 실제로 헌법을 개정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플루타르코스도 리산드로스가 실제로 헌법을 고치려 했고, 왕이 되려 했다고 봤다.)

아게실라오스가 리산드로스를 밀어내고 해군 사령관에 앉혔던 처남 피산드로스는 제 몫을 했을까? 리산드로스가 에게해를 제패했을 때 1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도망쳤던 아테네 장수 코논이 돌아와 피산드로스의 함대를 몰살시켰다. 스파르타는 다시 중무장보병에만 의존해야 하는 과거로 돌아가고, 아테네는 해상제국의 영광을 되살릴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눈앞의 권력에 가려 역사의 죄를 짓는 지도자들이 많다. 권력은 도전을 허락하지 않는다. 권력이 도전자에게 돌려줄 것이라고는 응징밖에 없다. 조선 시대 선조가 그랬다. 얼마나 많은 의병장들이 역모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는지 모른다. 이순신이 최후의 전투에서 죽지 않았던들, 이순신은 천수를 누릴 수 있었을까? 아마도 숙청 1순위 아니었을까? 토사구팽이라는 말처럼 전투가 끝나면 장수는 쓰임을 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투 중이라면 어떨까, 또는 전투를 앞두고 있다면?

현대 정치에서 권력자에게 최대의 전투는 뭐니뭐니해도 선거다. 총선을 앞두고 1인자와 2인자 사이에 벌어진 최고의 다툼은 이른바 ‘도장 들고 나르샤’로 표현되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와의 신경전이었다. 공천권을 누가 행사할지를 두고 벌어진 양보 없는 일전이었다. 그 결과는 모두의 패배였다. 당시 새누리당은 원내 과반을 차지하리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제로는 원내 1당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의 민주당은 국민의당에 텃밭 호남을 대부분 내어줄 정도로 약체였는데도 그랬다. 그로부터 약 1년 전,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로 낙인찍어 몰아냈다. 내부의 분열이 모두의 패배로 귀결됐다.

익숙한 장면이 다시 펼쳐지고 있다. 대통령이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라고 대선을 승리로 이끈 당 대표를 끌어내리더니, 대통령 주변인들이 당대표 경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을 하나씩 끌어내리려 한다. 급기야 대통령 자신이 유력 당대표 후보를 향해 “국정운영의 방해꾼”이라고 말한 사실까지 공개됐다. 그 덕분에 1년 후 총선에서는 최소한 ‘도장 들고 나르샤’와 같은 볼썽사나운 장면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벌어지는 장면 역시도 ‘도장 들고 나르샤’만큼이나 충격적이다. 나경원 전 의원을 때리기에 바빴던 사람들이 불과 1주일만에 때렸던 바로 그 손으로 약을 발라주겠다고 앞장서고 있다. 나경원 전 의원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된다고 치자. 국민이 받은 충격은 누가 치유해 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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