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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이야기] 무죄라며 사형, 위법이라며 무죄

등록 2023.02.21 10:00

수정 2023.02.21 13:55

파르테논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고 싶다면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갈 일이 아니다. 맞은편 필로파포스 언덕이 파르테논의 전경을 잘 감상할 수 있는 명당이다. 관광객들이 필로파포스 언덕에 가는 목적은 파르테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말고 또 하나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갇혀 있던 감옥이라고 알려진 곳이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 이야기] 무죄라며 사형, 위법이라며 무죄
소크라테스의 감옥. 딱 보기에도 감옥의 이미지가 강렬해서 관광객들에게 뭔가 생각거리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곳은 아고라 주변에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고대 아테네에는 징역형이 없었다. 사형 아니면 추방형이었다. 아마도 죄수들을 먹이는 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감옥은 죄수들이 사형수들이 집행을 기다리는 임시 장소였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이례적으로 기간이 좀 길었다. 건국 영웅 테세우스를 기념해 델로스에 보내는 사절단이 돌아오기까지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과 나눴던 지적인 대화를 볼 수 있게 됐다. 플라톤이 전한 이 대화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 기록도 포함돼 있다. 물론 피고인 소크라테스의 발언만 전하기는 하지만.

 

[아테네 이야기] 무죄라며 사형, 위법이라며 무죄
델로스섬. 아폴론 신이 태어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한때 아테네가 해상제국을 운영할 수 있었던 힘 델로스동맹의 금고가 보관되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델로스섬은 사람이 살지 않아 황량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섬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해지기 전에 나와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서기전 399년 고발당해 법정에 섰다. 죄목은 불경죄였다. 아테네의 신을 숭배하지 않고 새로운 신을 들였다는 이유였다. 올림포스 신이 열둘인데서 알 수 있듯, 다신교인 그리스에서 새로운 신의 출현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올림포스 신의 반열에 오르지만 디오니소스만 하더라도 수입된 신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기에도 새로운 신이 수입됐고, 시민들이 축제를 벌이며 환영하기도 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경우 기존의 종교를 부인하는 '이성'을 내세웠기 때문에, 단지 새로운 신을 수입한 경우와는 달랐다. 하지만 당대에 이성적인 사고가 이미 만연해 있던 터에 굳이 소크라테스만 처벌할 일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죄목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살아 생전에도, 2,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산파술이라고 불리는 특유의 대화법으로 유명하다. 상대가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이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사람 바보 만드는 수법이다. 문제는 이 대화법을 젊은이들이 기성세대를 상대로 따라 했다는 점이다. 기성세대에게 당연한 일을 젊은이들이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 따지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문제 제기에 어른들은 말문이 막혔고 '이게 다 소크라테스 때문이야'를 외치게 되었다.

죄목이 또 하나 있다. 플라톤이 전하는 대화록에는 없고, 또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의 저작에 등장하는 고발자의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존경받는 법제도를 친구들이 비웃게 했습니다. 도시의 통치자를 제비뽑기로 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면서요. 제비뽑기로 정한 선장이나 건설업자, 플루트 연주자, 장인을 고용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지요." 당시 아테네는 제비뽑기로 공무원을 뽑았다. 누구나 공평한 1표를 갖고, 누구나 공평하게 공직 취임의 기회를 갖는다는 취지였다. 바로 아테네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민주주의의 핵심이었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제비뽑기로 공직을 역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능력이 아닌 운수로 공직을 맡는 제도가 웃긴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웃긴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플라톤이 언급하지 않은 이 이유가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당시는 스파르타와 27년동안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한 직후였다. 전쟁 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후원을 받은 30명의 참주가 정권을 잡았다. 30인 참주정은 공포를 앞세운 독재정치를 자행했다. 한달에 100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30인 참주의 정적들도 있지만, 개인적인 원한으로 죽인 사람들도 많았고, 재산을 빼앗기 위해 죽인 사람도 많았다. 그 참주정의 지도자는 크리티아스라는 인물이었는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성욕이 강해 소크라테스가 '발정난 돼지'라고 욕했던 인물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그저 독재자와 한통속일 뿐이었다.

 

[아테네 이야기] 무죄라며 사형, 위법이라며 무죄
(왼쪽)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원래 정치에 뜻을 뒀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민주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소크라테스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인식되게 한 크리티아스의 친척이었기에 당대 분위기에선 정치 참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오른쪽) 클레로테리온. 제비뽑기 기계.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제비뽑기는 단순한 운수 소관이 아니었다. 신의 선택을 받는 일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된 때는 민주정치가 복원된지 3년 후였다. 고발자는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세 명으로 전해진다. 고발장은 멜레토스가 썼던 듯한데, 실제 중요한 고발자는 아니토스였다. 아니토스는 민주정치가 회복된 뒤 대사면령에도 불구하고 과두파 살육을 감행했던 인물이다. 민주파라고 자임하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민주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기도 했다.

고대 아테네의 재판에는 검사도 없었고, 변호사도 없었다. 고발자가 검사였고, 피고인 자신이 변호사가 되어야 했다. 판사도 없었다.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고발자와 피고인의 입장을 듣고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투표로 판결했다. 양측의 변론을 듣자마자 곧장 판결을 내렸다. 심사숙고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잠깐만 배심원들을 현혹한다면, 죄를 짓고도 무죄 방면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직업적인 변론가가 써준 원고를 읽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달랐다.

평생 시장(아고라)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깨달음을 주려 애썼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재판을,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어쩌면 사람들을 만날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재판에서 이기면 되지만, 소크라테스는 처음부터 이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형을 결정하는 재판을 하루가 아니라 여러 날 진행한다면 제가 여러분을 설득할 수 있을 테지만, 이 엄청난 비방을 짧은 시간에 몰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에게 무죄를 호소하기보다는 철학을 강의했다. 배심원단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는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마치 교수가 학생들을 대하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신에게 저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이 대답하기를,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배심원석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와 고성을 적는 대신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제가 뽐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제 말을 끊지 마십시오”, “제 말에 소동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같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옮겨 적어 법정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전해준다.

마침내 배심원단의 1차 판결이 나왔다. 유죄 280표, 무죄 220표였다. 큰 차이로 보이지만, 유죄를 선택한 사람들 30명의 마음을 무죄로 돌렸다면, 소크라테스가 재판의 규칙대로 승소를 위해 노력했더라면 무죄가 나올 수도 있었던 결과였다. 아테네의 법정은 진실이 아닌 아첨을 요구했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단에게 아첨하기보다는 끝없는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유죄 판결은 소크라테스가 자초한 일이었다.

아테네의 법정은 먼저 유무죄를 가린 뒤, 유죄 판결이 나면 형량을 정하는 절차를 한 번 더 거친다. 고발자들은 사형을 형량으로 제시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안은 프리타네이온에서의 식사였다. 프리타네이온은 아테네의 시민회관이자 영빈관이었다. 제비뽑기로 공직에 취임한 사람들이 국가가 제공하는 식사를 하는 곳이자, 아테네를 찾은 외빈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곳이기도 했다. 처벌의 수위를 정하는 자리에서 영예를 달라고 요구한 셈이다. 배심원단들로서는 우롱당하는 느낌을 받을만한 상황이었다.

 

[아테네 이야기] 무죄라며 사형, 위법이라며 무죄
고대 아고라. 비교적 멀쩡하게 생긴 건물이 헤파이스토스 신전이다. 중세에 교회당으로 쓰인 덕분에 건물 모양을 유지한 채 살아남았다. 아테네인들은 이 신전을 오랫동안 테세이온(테세우스 신전)이라고 불렀고, 현재 이곳 근처 지하철역 이름도 테세이온역이다. 고대 아고라는 테세이온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고, 프리타네이온도 그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농락당한다고 느낀 배심원들이 마구 흥분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처벌을 제안했다. 벌금 30미나였다. 30미나라면 0.5 탈란트였다. 거액이었다. 보통 사람이 한푼도 쓰지 않고 10년을 꼬박 모아야 쥘 수 있는 돈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 정도 금액을 진지하게 제시했다면 소크라테스에 대한 판결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미 처벌 대신 영예를 달라는 말에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한 배심원단의 귀에 상당한 벌금액수를 제시한 진지한 제안은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최종 판결이 나왔다. 340대 160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유무죄 판결 당시 유죄 280 대 무죄 220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무죄라고 판단했던 60명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내려야 한다고 판단한 셈이다. 무죄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 나쁘다고 사형을 선고한 셈이다. 사람 목숨을 다루는 법률 판단의 무게가 가볍기 그지없다. 소크라테스의 거만함이 자초한 일이라 하더라도, 배심원단은 최소한의 일관성마저 상실했다.

2,500년 전 최소한의 법률 지식도 없이 아테네 시민이라는 자격만 갖추고 재판을 했던 배심원들이야 제 기분에 따라 판결을 했다 치자. 법률가가 최고의 지식인 대접을 받는 현대에도 소크라테스 재판 못지않게 황당한 판결이 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을 불법으로 막고 관련 수사를 무마한 혐의로 기소된 이광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이성윤 전 서울고검장, 차규근 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등에 대한 무죄 판결이다. 재판부는 “김 전 차관 긴급 출금은 위법했다”면서도 “출국 용인 시 김 전 차관 재수사가 난항에 빠져 과거사에 대한 국민 의혹을 해소하기 불가능했다”고 무죄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위법을 저질렀는데 무죄라니! 쉬운 말로 하면 ‘김학의는 나쁜 놈이기 때문에, 나쁜 놈한테는 위법 좀 저질러도 된다’는 뜻이다. 정치인이 하더라도 욕먹어 마땅한 말을 판사가 판결문에 버젓이 적어놓는 모습은 황당을 넘어 뻔뻔스럽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보지만 형사가 범인을 체포할 때 "변호사를(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체포적부심을 법원에 신청할 수 있다"며 피의자의 권리를 읊어준다. 이걸 미란다 원칙이라고 부르는 건 상식인데, 어쩌다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63년 미국에서 에르네스토 미란다가 8달러를 강도질하다 붙잡혔다. 조사 과정에서 18세 소녀를 강간한 사실도 자백했다. 하지만, 미란다는 자신의 법적 권리를 고지받지 못한 채 이뤄진 자백이라며 증거능력을 부인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란다의 말이 맞다고 인정했다. 강간범 미란다는, 미란다 원칙을 지키지 않은 수사팀 덕분에 무죄가 됐다. 일반인의 관념으로는 정의와 거리가 멀지만, 법적 정의란 이렇게 절차 하나하나의 합법성을 따지는 일이다. 부당한 방법을 썼다면, 그 결과가 정당한 일이 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으로 되돌아가면, 무죄라고 판단하고도 사형을 선고한 60명의 배심원도 웃기지만, 배심원단 전체를 바보 취급한 소크라테스의 태도 역시 결코 바람직하지 못했다. 철학자로서는 위대한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피고인으로서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피고나 변호인이 재판에 불성실하게 임하면 충분히 무죄를 받을 수 있는 사안으로도 사형 판결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고발자나 검찰이 재판에 불성실하게 임하면 누가 봐도 범죄자인데 멀쩡하게 무죄 판결을 받고 당당하게 걸어 다니기도 한다. 곽상도 전 의원이 그렇고, 윤미향 의원이 그렇다.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아테네 법정은 단심제였다. 단 하루동안의 심리로, 심리 당일 판결을 내리고, 항소 절차도 없었다. 다행히 2023년의 대한민국은 3심제를 선택하고 있다. 1심 판결이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바로 잡을 기회가 있다. 상급심이 판사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도 있고, 검사가 공소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더 보강할 수도 있다. 아직 정의를 되찾을 기회는 남아 있다.

 

[아테네 이야기] 무죄라며 사형, 위법이라며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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