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전체

[아테네이야기] 이러라고 불체포특권이 있나…잘못 쓴 제도의 최후

등록 2023.02.28 09:27

수정 2023.02.28 09:30

파르테논 신전을 보러 아크로폴리스를 오르면 현관에 해당하는 프로필리아의 장대함에 먼저 압도되기 마련이다. 육중한 도리스식 기둥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방문객의 존경심을 자아내는 특징이 있다. 방문객들은 경외심을 갖고 프로필리아를 통과해 드디어 파르테논을 실물로 만나게 된다. 파르테논을 기대하느라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지만, 한번은 돌아보길 추천한다. (바닥이 미끄럽고 가파르니 꼭 걸음을 멈추고 봐야 한다.) 그곳에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현장이 있다. 민회가 열리던 프닉스 언덕이다.

 

[아테네이야기] 이러라고 불체포특권이 있나…잘못 쓴 제도의 최후
프로필리아. 지금은 사라졌지만 육중한 기둥 위로 지붕이 얹혀 있었다. 지금도 관람객들이 많아 사람들에 밀려 다니기 쉬운 곳이지만, 과거에도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둥 사이사이로 5개의 통로가 열려 있었다. 방어요새라는 아크로폴리스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너무 외관에 치중한 프로필리아는 한번도 완성된 적이 없다. 완공 직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아테네이야기] 이러라고 불체포특권이 있나…잘못 쓴 제도의 최후
프로필리아에서 내려다 본 살라미스섬과 프닉스 언덕. 아크로폴리스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좁은 바다에서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졌다. 수풀 사이로 보이는 공터(표시된 부분)가 프닉스 언덕이다. 고대 아테네 민회가 열리던 곳이다.


 

프닉스 언덕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원한다면 고대의 정치가처럼 연단에 올라 일장 연설을 해볼 수도 있다. (그 연설을 들어줄 사람이 없고, 허술한지만 줄로 된 울타리를 넘어가야 한다는 단점은 있다.) 고대의 극장이 부채꼴로 소리 전달에 편리하게 설계됐다면, 민회는 최소한의 연단만 설치된 채 최소한의 건축적 도움도 없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런 환경에서 연설을 하자면 무엇보다 큰 목청이 정치인의 가장 큰 자질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긴 페리클레스의 목소리는 '천둥같다'고 했더랬다.

정치인들이 목이 쉬어라고 소리를 지르느라 고생했다면, 청중이자 유권자들이자 정책 결정권자였던 시민들도 썩 편하게 연설을 감상하기는 어려웠지 싶다. 연단이 높고, 청중석은 뒤로 갈수록 낮아지는 구조다. 연단을 바라보고 (맨땅에, 땡볕에) 앉으면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기 십상이다. 아마 청중들은 민회에 참석하는 내내 서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구나 당시 시민들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시민들이 민회에 참석하는 자체가 썩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은 의원회관에서 200미터도 안 되는 국회 본청으로 넘어갈 때도 차량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아테네이야기] 이러라고 불체포특권이 있나…잘못 쓴 제도의 최후
프닉스 언덕. 멀리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고대 아테네 민회가 열리던 곳이다. 표시된 부분이 연단이다. 최소한의 음향 장치도 없고, 조명도 없다. 해가 지면 회의를 진행할 수 없었다. 회의의 마지막 절차는 표결인데, 막상 찬성과 반대 의사를 표명한 사람들의 수를 셀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아테네 정치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 판이 불리할 때 회의를 다음날로 넘긴 뒤, 밤새 분위기 반전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꽤 자주 보인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독재자를 몰아내고 탄생했다. 새로운 독재자의 등장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만든 제도가 도편 추방제였다. 도자기 파편에 ‘독재자가 될 위험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최다득표자를 10년동안 추방하는 제도였다. 먼저 도편추방 투표를 할지를 결정하고, 그 다음 누구를 추방할지를 결정했다. 도편추방제가 독특한 점은, 위법을 저질렀는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저 '저 사람은 왠지 독재자가 될 것 같아'라는 공감대만 있으면 됐다. 심증만 있으면 충분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추방될 수 있었다.

딱히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도편추방을 당한다고 해서 딱히 불명예가 되지도 않았다. 재산상 불이익도 없었다. 그저 10년 동안 아테네를 떠나 있기만 하면 됐다. 그래도 한참 일할 시기의 10년을 경력에서 없애버리면, 재기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더구나 고대 아테네의 평균 수명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도편추방제가 도입된 이후 20년 동안은 시행되지 않다가, 갑자기 매년 1명씩을 추방하기도 한다. 그렇게 추방된 사람 중 한 명이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티포스다. 크산티포스는 살라미스 해전 이후에 터키 앞바다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박살내고 해상 제국 아테네를 만드는 초석을 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페리클레스는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에 정계에 입문했는데, 아버지가 도편추방을 당했던 기억 때문이 아니냐고도 한다. 말하자면 도편추방에 트라우마가 있었던 셈이다.

크산티포스 이후 도편추방을 당했던 인물들을 열거하면 그대로 아테네의 주요 정치사가 된다. 아테네 정치사를 쥐락펴락했던 인물들이 도편추방을 당하기 때문이다. 먼저 등장하는 이름은 아리스테이데스다. 해상제국 아테네를 설계한 인물이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동맹국들에게 군사력이나 분담금을 걷었는데, 대부분은 돈만 내는 쪽을 택했다. 처음에는 동맹국이 내는 방위 분담금의 성격이었지만, 아테네가 해상제국이 된 다음에는 조공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아리스테이데스는 국가별로 조공액수를 정했던 인물이다. 아리스테이데스 이후 조공액수는 거의 변한 적이 없는데, 그만큼 공정하게 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리스테이데스에게는 '정의롭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 '정의로움'을 보여주는 일화가 전해내려오는데, 하필 아리스테이데스가 도편추방을 당할 때의 얘기다.

당시 아테네는 문자가 아닌 말의 사회였다. 평생 시장 바닥에서 철학을 논하면서 단 한편의 저작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가 말 중심의 아테네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아테네인 대부분은 글자를 쓰고 읽을 줄 몰랐다. 도편추방을 할 때 추방자의 이름을 써내야 하는데, 그 역시 누군가에게 써달라고 부탁하기 일쑤였다. 민회에서 누군가 아리스테이데스에게 도편에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여기다 아리스테이데스라고 좀 써주시오."
"아니 그 자가 무슨 해꼬지라도 했나요? 왜 그 사람을 추방시키려 하나요?"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오. 그저 남들이 하도 그자를 두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찬하기에 재수 없어서 그런다오."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는 그 말을 듣고 군말 없이 자기 이름을 도편에 적어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리스테이데스가 도편추방을 당한 건 사실이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또 한 명의 아테네 정계 거물이 도편추방을 당한다. 살라미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였다.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지 10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위세를 떨쳤을 법하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한 명이 돋보이기를 원치 않았다. 구국의 영웅을 도편추방해버리고 말았다. 당대에도, 후대에도, 테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와 내통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실제로 테미스토클레스는 추방당한 후 페르시아에 눌러앉아 살기도 한다. 하지만 내통이 확실하다면 반역죄로 처벌할 일이지, 도편추방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도편추방은 참주가 될법한 인물을 예방적으로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제도지, 실정법 위반을 처벌하는 제도가 아니다.) 아마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들이 적대적인 여론을 조성하려 퍼뜨린 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테네이야기] 이러라고 불체포특권이 있나…잘못 쓴 제도의 최후
도편추방 투표에 사용된 도자기 파편들. 자세히 보면 이름이 적혀 있는데, 대부분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게다가 대부분 필체가 똑같다. 문맹이 많았던 사회에서 이름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조직적인 몰표가 이뤄졌다는 혐의가 짙다.


 

[아테네이야기] 이러라고 불체포특권이 있나…잘못 쓴 제도의 최후
테미스토클레스의 성벽.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이후에도 해군 중심의 아테네 안보 체제를 완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성을 쌓아 육상으로 아테네를 공격할 수 길을 모두 차단하고,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도 두 개의 긴 성벽으로 감쌌다. 아테네 시내 곳곳에 남아있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성벽'은 그 유적이다.

테미스토클레스를 추방시킨 배후는 아마도 테미스토클레스가 사라진 이후 아테네 정계를 주름잡은 키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키몬은 페르시아의 1차 침입을 물리친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의 아들이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군인이었던 키몬은 국내 정치보다는 대외원정에 힘을 기울였다. 고대의 전쟁은 돈벌이 사업이기도 했기 때문에 키몬은 대단한 부자였다. 키몬은 자신의 재산으로 공공건축물을 짓는다는지, 자기 돈으로 빈민구제 사업을 벌인다든지 하는 선심을 써서 민심을 얻었다.

키몬은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스파르타에 지나치게 우호적이었다. 아들 이름을 스타르타의 또다른 이름인 라케다이몬이라고 지을 정도였다.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병영 국가인 스파르타에 끌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페르시아가 건재한 상황에서 스파르타와의 공존이 아테네 안보의 필수 요소라고 느낀 탓인지는 모른다. 문제는 키몬의 우호 정책에 스파르타가 전혀 호응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파르타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키몬은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가지만, 오히려 스파르타에 의해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상응 조치 없는 퍼주기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아테네로 돌아온 키몬은 자신이 그새 도편추방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아테네이야기] 이러라고 불체포특권이 있나…잘못 쓴 제도의 최후
키몬의 무덤. 필로파포스 언덕에 있다. 사실 이 무덤의 주인은 정치인 키몬의 할아버지인 또다른 키몬이고, 정치인 키몬은 고대 아테네의 국립묘지였던 케라메이코스에 묻혔다는 얘기도 있다.

그로부터 또 10여년 후에 또 한 명이 도편추방된다. 이름은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를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게 했지만, 정치인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를 괴롭히던 정적이다. 하지만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시민들이 '독재자가 될 위험'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페리클레스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도편추방제를 이용했을 뿐이다. 투키디데스가 추방되면서 페리클레스의 정치는 '말로만 민주정치'로 변질된다. 견제가 없는 권력은 언제나 독재로 흐르기 마련이다.

사실 키몬을 도편추방시킨 배후 역시 페리클레스였을 가능성이 많다. 키몬의 도편추방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페리클레스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크산티포스를 보면서 도편추방에 트라우마를 경험한 페리클레스가 정작 도편추방을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가장 잘 써먹은 사람이라는 사실도 참 아이러니다. 하지만 단지 정적이었을 뿐 독재자가 될 깜냥은 아니었던 투키디데스를 도편추방했다는 점에서, 페리클레스는 도편추방제를 오염시킨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동안 도편추방은 실시되지 않는다. 20년동안 페리클레스와 경쟁할만한 정치인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전쟁 통에 누구를 도편추방할 상황도 아니었다. 아테네는 전쟁이 벌어지면 도편추방했던 사람도 불러들이고는 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그렇게 돌아왔던 사람 중 하나다.

거의 잊혀지는가 싶던 도편추방제는 시칠리아 원정을 앞두고 한 번 더 시행된다. 당시 아테네 정계는 원정을 떠나자고 주장하는 알키비아데스와 원정을 반대하는 니키아스를 중심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테네는 그때 스파르타와 강화조약을 맺은 상태였는데, 그 조약을 협상하고 서명한 사람이 바로 니키아스였다. 그래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와중의 잠깐의 휴식기를 '니키아스의 평화'라고 부른다. 니키아스로서는 전쟁의 재개를 뜻하는 시칠리아 원정에 찬성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30년 이상 시행되지 않은 도편추방제로 정적을 제거하기로 한다. 도편추방제는 일단 도편추방을 할지 여부를 먼저 결정한 뒤, 누구를 추방할지를 한 번 더 투표한다. 일단 도편추방을 시행하기로 하는 것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런데 표 계산을 해보니 너무나 팽팽했다. 양측 모두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상대를 제거하려다 자칫 자신이 도편추방의 희생자가 될 위험이 너무나 컸다. 양측은 둘 다 사는 길을 찾았다. 일단 도편추방을 하기로 했으니 누군가는 추방당해야 한다. 양측은 제3의 인물을 희생자로 삼기로 야합했다. 그리고 막말 정치인으로 밉상이긴 했어도 '독재자가 될 위험'과는 거리가 먼 히페르불로스라는 인물에게 몰표를 던졌다. 진짜 '독재자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 둘이서 자기 살자고 엉뚱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조직적인 몰표에 동참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은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아연실색했다. 이런 식의 도편추방이라면 안 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이미 페리클레스 시절부터 도편추방제가 오염됐다는 여론이 조성돼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도편추방의 대상으로 싸구려 정치인이 뽑히자 그들은 제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도편추방제는 더 이상 시행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됐다. 찬성표가 더 많았지만, 어쨌든 과반수에 미달했으니 부결이다. 민주당 소속 의원조차 최소한 31명이 차마 반대표를 던질 수 없었던 체포동의안이다. 이재명 대표는 검찰의 사법 사냥이라고 하지만, 대장동 사건은 문재인 정부 때 이미 수사를 시작한 지역 토착비리 사건일 뿐이다. 민주당 의원들조차 정치탄압,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기 부끄러운 부패, 비리 범죄 혐의다.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은 본래 왕이 의원을 구금해 의회의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의도를 사전에 차단해 의원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마련된 제도였다. 왕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시절의 제도다. '방탄국회'라는 말이 일상언어처럼 쓰이는 지금은 국회의원이 법망을 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된지 오래다.

제도가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면 구습이고 병폐일 뿐이다. 개혁 대상이다. 없어지는 게 순리다. 이재명 대표 자신도 불체포특권 폐지를 공약했었다. 실제 21대 국회에선 정정순(민주당)·이상직(무소속)·정찬민(국민의힘) 의원에 대해 제출된 체포동의안 3건이 모두 가결됐다. 신뢰를 상실한 도편추방제를 더이상 시행하지 않은 것처럼, 수명을 다한 불체포특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역사의 물줄기를 이재명 대표가 되돌리려 하고 있다. 한강물을 손으로 막을 수 없듯, 역사의 물줄기를 이재명 한 사람이 막을 수 없다.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부결은 불체포특권이 폐지되는 그날을 더욱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뿐이다.

 

[아테네이야기] 이러라고 불체포특권이 있나…잘못 쓴 제도의 최후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