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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이야기] 오리발, 시간끌기, 그 다음은 '배째라'

등록 2023.03.14 08:13

수정 2023.03.14 09:32

'아테네에서 가장 큰 신전은?'이라고 퀴즈를 낸다면 아마 '파르테논'이라는 답이 가장 많을지 모르겠다. 물론 오답이다. 정답은 제우스 신전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 보면 전경을 볼 수 있다.

페리클레스보다 100전 쯤 먼저 살았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건설을 시작했지만, 당시 변방 국가였던 아테네가 감당할만한 규모가 아니었던지라 곧 공사가 중단됐다. 아테네에 돈이 넘쳐나는 번영의 시대에도 누구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과업을 물려받아 신전을 완성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개발독재를 이끌었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민주정치가 꽃피운 아테네에서 참주의 대표격이었다. 신전은 아테네의 시대가 저물고도 한참 후 로마가 완성했지만, 그마저 곧 무너지고 만다.

 

[아테네 이야기] 오리발, 시간끌기, 그 다음은 '배째라'
(사진 위)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본 제우스 신전. (사진 아래) 한때의 화려함을 과시하는 제우스 신전의 기둥들. 신전의 기둥들은 다른 건물의 석재로 사용되기 위해 사라졌다.


제우스 신전 주변에 볼품없는 돌무더기에 안내팻말이 붙어있는 유적이 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성벽'이다. 그 자체로 요새인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주민들의 거주지역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벽의 흔적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시대에는 성을 공격할만한 무기가 개발돼 있지 않았다. 천하무적 스파르타군도 적이 성 안에 숨어서 싸우러 나오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테미스토클레스보다 약 150년 후에 활동한 알렉산드로스조차도 성을 공격할 때에는 유독 애를 먹었다.)

 

[아테네 이야기] 오리발, 시간끌기, 그 다음은 '배째라'
(사진 위) 제우스 신전 옆의 테미스토클레스 성벽. 제우스 신전은 물론이고 테미스토클레스의 성벽에 쓰인 돌들도 수천년의 시간동안 다른 건물의 석재로 사용되느라 사라졌다. (사진 아래) 테미스토클레스 성벽 너머로 보이는 하드리아누스 문과 그 너머의 아크로폴리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전 승리를 이끈 전쟁영웅이었다. 아테네 남쪽에서 은광이 발견됐을 때 해군을 건설하자는 제안을 하고 관철시킨 비전과 뚝심이 있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은 부당해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침략 때 델피의 아폴론 신탁은 명쾌하게 '도망가라'는 것이었다. 군사력의 차이가 압도적이니, 신의 뜻이든 정보력에 기반한 델피 사제들의 뜻이든, 합리적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마도 델피 사제들에게 뇌물을 써서) 다시 한번 신의 뜻을 묻고 새로운 신탁을 얻어낸다. '나무로 만든 벽으로 싸우라'는 것이었다. 나무로 만든 벽이란 물론 배였다. 바다에서 승부를 보라는 뜻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신탁을 근거로 아테네를 적의 손에 넘겨주고 살라미스를 근거지로 삼아 바다에서 결전을 펼치자고 설득한다.

신탁을 조작해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또 하나의 숙제가 있었다. 그리스 연합군의 주력이었던 스파르타는 자신들이 익숙한 육상 전투로 승부를 내려 했다. 실제로 연합군 해군 전력을 남쪽으로 철수시키려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군에 연합군의 철수 계획을 흘려 퇴로를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원치 않는 연합군을 전투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국제정세의 변화도 정확히 읽어냈다.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다음에는 결국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대결 국면이 펼쳐지리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페르시아군이 점령했던 아테네 시내를 복구하면서 테미스토클레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벽을 쌓는 것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이 있기 불과 30년 전 아테네에 참주정이 무너지고 민주정이 도입되던 당시 스파르타가 군사력을 앞세워 개입한 적이 있었다. 스파르타는 마음만 먹으면 아테네의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나라였다. 바꿔 말하면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군사력 앞에 나약했다. 바로 그 스파르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성벽이었다.

아테네가 성벽을 쌓는다는 소식을 접한 스파르타는 즉각 반발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택한 첫번째 방법은 오리발이었다. '아테네가 성벽을 쌓는다니, 금시초문이군! 스파르타가 지켜주는데 아테네가 왜 성벽 따위를 쌓느라 힘을 빼겠습니까?' 이런 식이었다. 스파르타의 의심이 이어지자 테미스토클레스가 직접 스파르타에 가서 해명을 했다. 물론 말만으로 하진 않고 스파르타 정계에 뇌물도 뿌렸다고 한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두번째 방법은 안심시키기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내 말을 못 믿겠거든 확인해 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대항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고 진정성 있게 말했다. 실제로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 확인에 나섰다. 요즘말로 하자면 실사단을 보낸 셈이다. 하지만 이 역시 테미스토클레스의 세번째 꼼수의 일환이었다. 시간끌기였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사절단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고 성벽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수상쩍게 여긴 스파르타 사절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귀환도 막았다. 졸지에 사절단은 볼모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 성벽은 완성됐다. 중간 과정이 어찌됐든, 이미 성벽이 완성된 이상 아테네는 더 이상 스파르타가 마음대로 어찌해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마지막 꼼수는 '배째라'였다. 스파르타가 보낸 사절은 이미 인질이 되어 있었다. 스파르타는 자국 사절을 돌려받는 대가로 테미스토클레스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성벽 해체 따위는 말도 못 꺼냈다. 아테네는 선심 쓰듯 인질을 돌려보냈다. 협상의 주도권이 이미 아테네로 넘어간 상태였다. 아테네 곳곳에 남아 있는 성벽의 잔해들이 테미스토클레스의 성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다.

 

[아테네 이야기] 오리발, 시간끌기, 그 다음은 '배째라'
기념품 가게에서 만난 테미스토클레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페리클레스의 모형은 없으면서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떨어지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어서 다소 뜻밖이었다. 아마 페리클레스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강한 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장군의 이미지가 강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테네가 쌓은 성벽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나중에는 아테네 시내와 항구를 잇는 길까지도 성벽으로 둘러쌌다. 아테네가 바다에서 우위를 지키는 한 누구의 위협도 받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한 것이다. 약 50년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스파르타 군은 매년 아테네로 진격해 나갔지만, 성밖의 올리브 과수원을 불태우는 것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성벽을 깰 전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30년 가까이 이어졌지만, 아테네 주변에서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긴 전쟁 끝에 결국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낼 때 첫번째 조건이 '성벽을 무너뜨리라'는 것이었다.

북한이 잠수함에서 순항미사일을 쐈다고 발표했다. 남한 어디에나 핵을 날려보낼 수 있다고 과시한 것이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북한은 미국의 항공모함이나 전략자산(핵공격수단)이 한반도에 오면 하던 도발도 멈추곤 했다. 이젠 한미연합훈련에 때맞춰 보란듯이 도발을 자행할만큼 대담해졌다. 핵능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다.

북한이 핵능력을 키워오는 과정이 테미스토클레스가 성벽을 쌓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처음에는 오리발, 그 다음엔 안심시키기, 그리고 시간끌기를 거쳐 마침내 핵을 손아귀에 넣은 뒤에는 '배째라'다. 전력난을 핑계 대며 남한에서 돈 받고, 국제기구의 사찰단을 이리저리 돌리며 시간만 끌고, 핵개발은 자위용이고 남한을 공격할 의도가 아니라고 연막 피우고, 중국 앞세워 6자회담 한다면서 시간만 끌고,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며 남한을 미국과의 가교역으로 이용해먹고, 마침내 핵개발을 완성한 다음에는 마음껏 도발하며 '쫄리냐?'고 조롱한다.

스파르타는 함께 페르시아를 물리쳤던 테미스토클레스를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한국 역시 '민족만한 동맹은 없다'는 말에 가슴 뜨거워지는 동포애에 현혹됐는지 모른다. 오판과 시행착오를 거듭한 지난 수십년이었다. 그 결과는 북한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 현실이다.


 

[아테네 이야기] 오리발, 시간끌기, 그 다음은 '배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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