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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Talk] "기괴한 좀비와 귀여운 꽃동산 사이"…'이상한 나라의 다카시'

등록 2023.04.13 15:53

수정 2023.04.13 19:54

[취재후 Talk] '기괴한 좀비와 귀여운 꽃동산 사이'…'이상한 나라의 다카시'

 

부산 해운대를 뜨겁게 달군 전시가 있다. 살점이 뜯긴 채 포효하는 좀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에 버금가는 거대한 도깨비, 세상 밝게 웃는 무지개빛 꽃동산.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진지하게,거침없이 쏟아지는 아이디어의 향연.

상업예술과 순수예술을 아우르는 이상한 나라. 넉달 동안 13만 5400명 넘게 찾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대규모 회고전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展이다.

최초 공개작부터 대표작까지 30년에 걸친 다카시의 작품 세계를 한 번에 만날 수 있어서일까. 폭발적인 인기는 부산시립미술관이 긴급회의를 열어 3월까지였던 전시를 한 달 연장하게 만들었다. 오는 16일, 전시 종료를 앞두고 개막 전 직접 만난 다카시와의 인터뷰 후기를 풀어본다.

■제작 기간 18년, 소장이 날아와도 '꺾이지 않는 마음'

이번 전시에는 회화부터 조각, 설치, 영상까지 다양한 작품을 두루 볼 수 있지만 유독 대형 작품이 많다. 손톱보다 작은 깨알 같은 그림과 문양들로 채워진 캔버스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전시장 한쪽 벽면을 길게 채운 그림. 다카시의 시그니처인 스마일 플라워. 웃는 표정의 분홍 벚꽃으로 수 놓인 '벚꽃이 만발할 때(2022)'는 11년을 공들인 작품이다.

11년, 이쯤되니 궁금했다. 최장 시간 제작된 작품은 얼마나 걸렸을까. 여성 악마를 표현한 작품으로 전시장에는 없지만 18년 정도 걸렸다고 작가는 담담히 답했다. 어떤 작품이든 마음속에 "이제 됐구나. 완성됐다."는 확신히 서기 전까지는 작업을 끝내지 않는다고 했다. 슬럼프가 와도, 작품을 주문한 고객이 보채도 개의치 않는다. 완벽하게 완성됐다는 마음의 울림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소장이 날아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겪었다. 주로 클라이언트 주문을 받아 제작하는 그림들은 고객 입장에서는 되도록 빨리 받고 싶어하니 제작 기간이 길어질수록 독촉하거나 화를 내는 경우도 왕왕 있다. 변호사를 통해 고소장까지 날아왔다. 하지만 소장도 작가를 흔들지는 못한다.

"저는 아티스트로서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쉽게 타협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묵묵히 작업합니다."작가는 태연하게 말하고는 이런 농담을 덧붙인다. "물론 소장까지 날아오면, 저도 마감을 서두르기 위해 더 노력하죠. 하하"

허허실실 웃으며 말했지만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소장이 날아와도 꺾이지 않는 마음. 다카시의 이 고집과 완벽주의적 성향이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것일까.

■ K-콘텐츠가 탄생시킨 '무라카미 좀비'

 

[취재후 Talk] '기괴한 좀비와 귀여운 꽃동산 사이'…'이상한 나라의 다카시'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좀비로 형상화한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됐다. 6년에 걸쳐 완성한 좀비 모형. 실제 다카시의 몸을 생체 스캐닝해서 제작됐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작가는 특히 한국 '좀비물'을 많이 찾아봤다. 이렇게 좀비물을 많이 만들고 많이 보는 한국 사람들은 분명 좀비에 특화돼 있을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K-좀비물을 답습한 뒤 제작하면서 제작 기간은 점점 늘었다.

이만하면 됐나 싶으면 '더 리얼하게', '더 진짜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수정을 거쳤고 수준 높은 좀비물을 접한 한국 관람객의 안목과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까 봐 실핏줄 하나, 살점 하나도 심혈을 기울였다. 어떻게 하면 진짜 좀비 같을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완성된 작품이 전시장 유리벽 속에 갇힌 바로 그 좀비다.

뜯겨나간 살점과 근육 사이 드러난 내장. 얼굴 절반이 찢겨져 눈꺼풀 없는 안구로 정면을 응시하는 좀비. 자신의 반려견까지 좀비로 만들어버린 작가는 급기야 자기 머리에 스스로 칼을 꽂았다. 모형치고는 너무 진짜 같아 방송 뉴스에서는 자세히 담을 수가 없었던 아쉬움을 사진으로나마 달랜다.

 

[취재후 Talk] '기괴한 좀비와 귀여운 꽃동산 사이'…'이상한 나라의 다카시'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죽지 않는 존재. 좀비로 현대사회의 악마적 존재를 표현하고 싶었던 작가의 이름과 좀비를 합친 전시 타이틀 '무라카미 좀비'도 이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K-콘텐츠가 탄생시킨 작품이자 전시회인 셈이다.

 

[취재후 Talk] '기괴한 좀비와 귀여운 꽃동산 사이'…'이상한 나라의 다카시'
무라카미 다카시의 초기작 '탄탄보'(2001)


■금색 배경에 숨은 초심자의 열정

인터뷰 당시 다카시의 초기작 '탄탄보(2001)'를 뒷배경 삼아 촬영을 진행했다. 바로 옆 벽면에는 '벚꽃이 만발할 때(2022)'가 걸려 있었다.

"옆 작품처럼 황금빛을 반사하는 물감을 쓰고 싶었는데, 돈 없을 때 그린 작품이라 원하는 물감을 살 형편이 못 됐죠. 금색과 가장 비슷한 물감을 사용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슬펐지만 20년도 지난 지금 이 작품을 보니 젊은 시절의 초심, 첫 열정이 생각나네요." 작가가 자신의 초기작을 보며 말했다.

 

[취재후 Talk] '기괴한 좀비와 귀여운 꽃동산 사이'…'이상한 나라의 다카시'
프랑수아/ 벚꽃이 만발할 때( Francois / Cherry Blossom Season -2022)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끝내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해야 했던 창작 의도. 부와 명성을 얻어 유명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됐을 때 비로소 원하던 물감을 쓸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아주는 것보다 지금 그에게 소중한 것은 그때의 그 '초심'이다. 물감과 재료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원 없이 창작하는 일. 머릿속에 그린 그대로 작품으로 구현했을 때의 기쁨은 얼마나 크고 충만할까.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벽면에 걸린 최근작을 보니 과연 배경이 황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제1 전시장 가장 안쪽, 연이어 걸려 있는 두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금색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기꺼이, 미치고 싶다는 작가

 

[취재후 Talk] '기괴한 좀비와 귀여운 꽃동산 사이'…'이상한 나라의 다카시'
무라카미 다카시 /Photo by RK ⓒTakashi Murakami/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제가 처음부터 하고 싶은 것은 머리가 좀 이상해지는 겁니다."

훗날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예술가로서의 꿈을 묻자 돌아온 답변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좋은 예술가들은, 예를 들면, 고흐나 고야는 사실 죽기 직전에 좋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사람들은 머리가 약간 이상해졌잖아요. 대가들이 말년에 그러했듯 저 또한 제가 죽기 1~2년 전에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 생각합니다. 약간 머리가 이상한 상태가 됐을 때 말이죠."

온전한 정신을 잃고 미치광이가 되는 한이 있어도, 걸작을 남길 수 있다면 기꺼이 미치고 싶다는 작가.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빈센트 반 고흐나 프란시스코 고야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열망. 앞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더 궁금해하고 기대하게끔 만든 말이었다.

스스로를 '오타쿠'로 칭하며 상업 예술을 하는 무라카미 다카시.하지만 직접 만나 본 그는 누구보다 예술가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순수하게 작업했고,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기 예술 세계를 고민하는, 작품에 대한 애정이 '광기'에 가까운 작가였다. 당신도 160여 점에 달하는 파노라마를 통해 이 '이상한 나라의 다카시'를 만나고 싶다면 주말이 가기 전 해운대에 가보라. 무료전시이니 전시를 볼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취재후 Talk] '기괴한 좀비와 귀여운 꽃동산 사이'…'이상한 나라의 다카시'
<붉은 요괴, 푸른 요괴와 48 나한> 2013 (Red Demon and Blue Demon with 48 Arhats)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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