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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장훈과 어머니

등록 2023.05.12 21:50

수정 2023.05.12 21:56

파꽃이 피는 계절입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봄 끝자락에 수더분하게 피운 꽃에서, 시인은 어머니를 봅니다.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하나 밀어 올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어머니' 여느 꽃들은 필 때가 절정이지만, 파꽃은 생의 막바지에서 핍니다.

대가 질겨져 제 할 일을 다하고 까만 씨를 내주며 스러지지요.

'모진 세월, 꽃 한 송이 올렸네. 하얗게 쪽진 머리 내 어머니, 오월 볕에 앉아 있네' 일본 프로야구의 거목이자 전설, 장훈은 평생토록 귀화를 마다했습니다.

늘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녔던 어머니처럼 살고자 했습니다.

장훈이 열여덟 살 때, 그를 간절히 원했던 프로 구단주가 '양자로 오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외국인 선수를 2명까지 둘 수 있는데, 구단에 이미 2명이 있었던 겁니다.

어머니는 단호했습니다. "이제 됐다. 야구 그만둬라. 조국을 팔면서까지 야구선수가 될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전부였던 야구보다, 지긋지긋한 가난 탈출보다 어머니에겐 조국이 소중했습니다. 구단은 야구협회를 조른 끝에 예외 규정까지 만들어 장훈을 영입했습니다.

홀어머니와 장훈 4남매는 히로시마에서 살다 원자폭탄의 불벼락을 맞았습니다.

열두 살 큰누이는 학교에서 숨졌고, 다섯 살 장훈은 외진 산중턱 집에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그를 꽉 껴안은 어머니의 치마 저고리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면서 마을에 진동하던 사람 타는 냄새를 지금도 기억한다며 울먹였습니다.

그러면서 한일 정상이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한다는 소식을 반겼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웃나라를 적으로 돌렸을 때 재일교포들은 너무 괴로웠다. 윤석열 대통령, 윤상은 진짜 사나이" 라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면 큰일나니까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내 조국이니까 하겠다"며 가슴에 묻어뒀던 말을 꺼냈습니다.

"언제까지 일본에 '사과하라' '돈 내라' 반복해야 합니까. 이제는 자부심을 갖고 일본과 대등하게 손을 잡아, 이웃나라로 가면 안 되겠습니까"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된 한국인 3만5천 명은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거나,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대한해협을 건넜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의 한국인 위령비 참배도 처음이라는 게 새삼 이상합니다.

한일 공동 참배를 제안한 기시다 총리는 히로시마 출신입니다. 나름의 용기가 필요했을 제안을, 재일교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장훈의 소회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40년 전 잠드신 어머니도 하늘에서 반기실 겁니다. 그런데 장훈 모자의 이 눈물나는 사연을 듣고도, 모국의 어느 누군가는 또 죽창가를 들먹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5월 12일 앵커의 시선은 '장훈과 어머니'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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