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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광주, 또 하나의 화해

등록 2023.05.25 21:50

수정 2023.05.25 21:55

"돈 워리! 돈 워리! 아임 미스터 김. 레츠 고 광주, 어? 오케이"

독일 기자 힌츠페터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생생하게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목격자' 였습니다. 그가 개인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취재를 마치고 광주를 빠져나가는 길목에서 검문에 걸립니다. 그런데 계엄군 중사는 트렁크에서 서울 번호판과 카메라를 발견하고도 못 본 척해줍니다.

"보내 줘. 보내라고!"

참혹한 현장에는 늘 의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자는 거야? 당장 구급차 대기시켜!"

격전지 전남도청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병원에서 밤낮없이 진료하던 반상진 원장은 두 번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대학생을 구타하는 계엄군에게 "내 병원 환자인데 오늘 꼭 치료받아야 한다"고 속여 몰래 피신시켰습니다. 낙오해 부상한 공수부대원이 시민군에게 잡혀왔을 땐, 수술부터 한 뒤 집 안방에 숨겼습니다. 시민군들에게는 "잠깐 사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공수부대원을 사흘 동안 보호하다 사복을 갈아입혀 부대로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계엄군은 일찍 세상을 떴지요.

어제 초로의 남자가 광주 삼일의원에 들어서자마자 노의사에게 큰절부터 올렸습니다. 43년 전 광주로 진입하다 시위대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었던 계엄군 상병, 박윤수 씨였습니다. 그때 이름 모를 시민군이 "병원부터 보내 치료를 받게 하자"며 격앙된 시위대를 달랬습니다. 그렇게 옮겨진 병원이 삼일의원이었지요.

의사 정영일 씨는 응급 치료로 박 씨의 의식을 되살린 뒤 위층 자택에 일주일 동안 숨겨놓고 보살폈습니다. 충분히 회복하자 사복을 입혀 부대로 복귀시켰지요.

다만 박 씨가 잃어버린 왼쪽 귀의 청력은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른쪽 귀로 이야기를 듣느라 이렇게 모로 앉아 있습니다. 43년 만의 재회는 5·18 진상조사위가 박 씨에 관한 기록과 신원을 추적해 이뤄졌습니다. 그는 "이제야 생명의 은인을 찾아뵙게 돼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광주를 원망하기보다는 나를 구해준 시민들께 감사한다"고 했지요.

옛말에 '잠자는 새는 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잡고 잡히는 운명일지라도, 무방비 상태에 놓인 생명은 어질게 지켜주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사람 살 곳은 골골이 있다'는 속담도 있지요. 아무리 어려운 처지여도 도와주는 사람은 어디나 있다는 뜻입니다.

극한상황에서 인간 사랑의 꽃을 피워내는,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합니다. 광주는 이렇게 하나씩 둘씩 따스한 치유와 화해를 쌓아가며 아픈 역사를 고귀한 헌신으로 보듬어내고 있습니다.

5월 25일 앵커의 시선은 '광주, 또 하나의 화해'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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