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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어떤 퇴장

등록 2023.12.12 21:50

수정 2023.12.12 21:53

조선시대 오륜행실도에 빠지지 않는 충신이 한나라 유방의 장수, 기신입니다. 유방이 항우 군에 포위되자 기신이 나섭니다. 한밤중에 유방처럼 차려입고 유방의 수레를 타고 성문을 나가 항복합니다. 그러는 사이 유방은 다른 문으로 도망쳤고, 기신은 분노한 항우에게 화형을 당했습니다.

고려 말 문장가 이곡이 썼습니다. '떨쳐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다만 의리를 따르니, 한나라 기신과 진나라 혜소로다.'

혜소는 반군에 포위된 황제를 끝까지 지키다 숨을 거뒀습니다. 목숨을 건진 황제는, 혜소의 피에 물든 자신의 옷을 다시는 빨지 못하게 했지요. 늘 당당했던 혜소를 가리켜 나온 사자성어가 '군계일학'입니다.

험난한 땅, 아프리카 험지로 떠나며 슈바이처는 삶의 소중한 세 가지를 희생했습니다. 음악 연주, 대학 강의, 경제 자립입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파묻혀 봉사하다 보니 작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바흐협회가 열대에서도 끄떡없는 피아노를 선물했습니다. 숱한 대학 강단에 섰고, 연주와 저술 수입으로 자립했습니다. '아들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처럼 희생을 면제받는 감동적 경험' 이었습니다. 

국민의힘의 친윤 핵심, 3선 장제원 의원이 "나를 밟고 윤석열 정부를 성공시켜달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시인 김현승의 시처럼 '내가 가진 마지막을 내어놓는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윤핵관'이란 부정적 별명을 자초하며 윤석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국민의힘이 당면한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장 의원의 총선 불출마를 1순위로 거론해 온 것도 이런 이유에섭니다.

하지만 장 의원은 인요한 혁신위가 희생을 강조하며 압박하자 오히려 세를 과시하며 맞받아쳤습니다. 그 이후로 민심이 급속히 악화했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판단을 한 듯 합니다.

하지만 평가할 대목은 있습니다. 몇몇 인사를 제외하고는, 다들 험지 대신 꽃길을 가겠다고 다투는 분위기에도 장 의원의 오늘 선언이 큰 변곡점이 될 듯합니다. 동시에 현 지도부를 옹위하며 공천에만 목을 매던 초선들은 모양이 조금 우습게 됐습니다.

국민의힘 초선 의원들은 그동안 가장 개혁적 이기는커녕 가장 현실에 안주해 온 집단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지요.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수도권을 '험지'라고 부르며 패배의 탈출구를 먼저 찾는 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수도권의 보수-중도 유권자들을 모독하는 일이고, 반신불수 정권으로 자멸하겠다는 얘기나 다름없습니다.

장 의원은 "역사의 뒤편에서 총선 승리를 응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떠납니다. 버려짐이 아니라 뿌려짐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 말에서 성경의 '밀알 하나'를 생각합니다. 그 밀알이 아무 의미없는 썩은 밀알이 될 지, 아니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값진 씨앗이 될 지는 지금부터 지켜 볼 겁니다.

12월 12일 앵커의 시선은 '어떤 퇴장'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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