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진퇴의 미학

등록 2023.12.14 21:50

수정 2023.12.14 21:57

1988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해태 선동열이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하지만 김응룡 감독과 선동열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선동열은 5차전까지 고비마다 보란 듯 불펜에서 공을 던졌습니다. 몸을 풀기만 해도 상대의 기가 질린다는 '선동열식' 무력 시위로 경기 흐름을 흔들어 놓곤 했지요.

우승 향배가 걸린 6차전, 상대팀은 이제는 선동열이 나올 거라 믿고 타순을 짰답니다. 하지만 끝내 등판하지 않았고, 해태는 그 경기를 이겨 우승을 거머쥐었지요.

이튿날 언론은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내쫓았다'고 썼습니다. 그 유명한 삼국지 고사가, 요 며칠 국민의힘을 보며 떠오릅니다. 관상가 송강호가 난세를 등지며 회한을 읊조립니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요체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진퇴의 미학' 일 겁니다. 하지만 물러날 때를 놓쳐 이름을 망친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던가요.

장제원 의원의 불출마 선언에 이어 김기현 대표가 사퇴했습니다. 이로써 '당정일체'를 내세워 김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던 두 사람의 '김-장 연대'가 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향한 세간의 시선이 덤덤합니다. 때를 놓치고 떠밀리다시피 내려오는 모습이라 그러겠지요. 

김 대표의 퇴진 역시 필연에 가까웠습니다. 강서 참패를 겪고도 '용산 출장소' 라는 오명을 벗어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혁신위의 희생 요구를 묵살하며 '윤심'을 자랑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반면 인요한 혁신위는 빈손으로 떠난 뒤에야 제갈공명처럼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결과적으로 혁신의 물꼬를 튼 반전 드라마이자 정치의 역설입니다. 어쨌든 두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국민의힘은 꺼져가던 혁신의 불씨를 되살려냈습니다.

새로운 리더십 구축, 기득권 타파, 새 피 수혈 그리고 대통령에게 쓴소리 하는 체질로 바뀌어야 살 수 있을 겁니다. 대통령실을 향한 민심의 온기를 되살리지 못하면 결국 총선에서도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민주당은 너무나 조용합니다. 이재명 대표와 개딸들의 위세에 눌린 탓인지 일부 비주류 의원을 제외하고는 혁신이나 희생 같은 단어를 들어볼 수가 없습니다. '이재명의, 이재명에 의한, 이재명을 위한' 당이 돼버렸다는 증거겠지요.

신당을 만들겠다고 나선 이낙연 전 대표를 거친 말로 비난하지만, 사실 그건 민주당 지도부가 자초한 일입니다. 기득권 용퇴론을 묻는 취재진에게 이 대표는 또 특유의 동문서답을 합니다.

"전세 사기 피해가 전국적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멀리 월나라 사람을 빌려다 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민은 지금 거대 양당 모두를 응급 수술이 필요한 환자로 보고 있습니다. 누가 하루라도 더 빨리, 한 치라도 더 깊이 수술칼을 대느냐가 생사를 가를 겁니다.

12월 14일 앵커의 시선은 '진퇴의 미학'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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