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비빔밥처럼

등록 2023.12.15 21:51

수정 2023.12.15 21:56

"쌀을 세 번 씻은 뒤 물 1.5배를 부을 겁니다." 

네 가지 SNS를 운영하며 세계 천 3백만 구독자를 거느린 뉴질랜드 요리사 앤디 헌든이 밥부터 제대로 짓습니다. 색색 채소를 다듬어 준비하는 건 비빔밥입니다. 고추장 양념을 만들어 맛봅니다.

"냠냠, 고추장 사랑해요." 

할리우드 스타 귀네스 펠트로가 요리사 친구와 함께 비빔밥 만드는 영상을 올린 게 벌써 14년 전 입니다.

"비빔밥? 비빔밥? "한국말로 모든 걸 다 섞었다는 뜻이야."

맞습니다. 이어령 선생 표현처럼 비빔밥은 '맛의 교향곡' 입니다. 거기에다 비빔밥처럼 고장 이름이 다양하게 붙는 음식도 드뭅니다. 전주, 진주, 해주, 통영, 황등 비빔밥에 안동 헛제사밥까지… 저마다 다른 맛과 꾸밈새를 뽐내지요. 하지만 어떤 비빔밥이든 그 한 그릇에는 맛 이상의 맛이 있습니다.

우리네 삶의 달고, 시고, 맵고, 짭조름, 쌉싸래한 오미가 고명으로 얹혀 있습니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겠다고 서로 머리 디밀던 양푼 비빔밥. 땡볕에 모 심다 보리밥에 푸성귀와 고추장을 썩썩 비벼 먹던 바가지 들밥. 제사 모신 뒤 나물과 전, 고기를 한데 섞어 나누던 제삿밥… 거기 어우러진 것은 너와 내가 아닌 우리였습니다.

코로나로 중단됐습니다만, 30년 전 시작한 관악산 연주암 점심 공양도 그랬습니다. 콩나물 무채 김치만 얹었어도 꿀맛이어서 등산객이 줄을 서곤 했습니다. 거기 담긴 절 집의 공덕이 맛을 내는 것이겠지요.

한국인이 아니어도 그 맛을 알까 싶었던 비빔밥이 세상의 일상 깊숙이 자리잡았습니다. 세계인이 올해 구글에서 요리법을 제일 많이 검색한 음식에 올랐습니다. 우선 드라마를 비롯한 K컬처로 접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겠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비빔밥의 묘미를 깨달은 걸까요. 비빔밥은 어디서든 곁에 있는 식재료들로 쉽게 꾸밀 수 있습니다.

곱게 어우러지되 하나하나 맛이 살아 있지요. 비빔밥은 내키는 마음껏 개성을 펼칠 수 있는 '식탁의 오케스트라' 입니다. 대한항공이 1997년 기내에 차린 바로 그 이듬해 세계 최고 기내식에 선정된 것 역시 비빔밥의 보편적 매력을 말해줍니다.

마이클 잭슨도 두 번째 한국 공연을 오던 비행기에서 맛보고 비빔밥 마니아가 됐다고 하지요. 그래서 이제 외국 항공사들도 다투어 비빔밥을 냅니다. 온통 분노와 증오와 전쟁에 휩싸인 세계가 비빔밥처럼 어울려 화합하면 좋으련만요.

시인이 드센 세상을 비빔밥 짓듯 순하게 살자고 합니다. '뻣뻣한 말들은 시금치와 콩나물처럼 데쳐서 숨을 죽이고, 가슴 속 응어리는 깨서 계란처럼 지단을 부친다. 고소한 맛이 나도록 감사의 변(辯)도, 그 위에 참기름처럼 뿌린다.'

12월 15일 앵커의 시선은 '비빔밥처럼'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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