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나보다 추운 당신에게

등록 2023.12.21 21:45

수정 2023.12.21 22:07

오스트리아 알프스 깊은 산속, 퍼붓던 폭설이 조금 잦아들자 아랫마을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집 창고에 쟁여뒀던 건초더미를 싣고 와 눈밭과 먹이통에 놓아둡니다. 기다렸다는 듯 가파른 비탈을 따라 굶주린 겨울 산짐승들이 내려옵니다. 사슴과 산양 수십, 수백 마리가 건초에 코를 박고 허겁지겁 배를 채웁니다.

"2015년 12월부터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겨울 눈과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야생의 삶에 먹이를 나누는 '빌트퓌터웅(Wildfutterung)' 입니다. 은총을 만난 듯, 사슴들 얼굴이 그지없이 편안하고 넉넉해 보입니다. 사람들을 응시하는 눈은 마치 인사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과 동물이 생명의 온기를 주고받으며 교감하는 경이로운 풍경은, 독일 알프스 자락에서도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미국 시인 사라 티즈데일이 매섭게 추운 겨울 밤 기도했습니다.

'달은 무정하고, 바람은 양날의 칼처럼 내리친다. 신이여, 이 밤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소서.'

소설가 심훈은 90년 전 서울의 겨울 밤을 이렇게 묘사했지요.

'달도 별도 없는 음침한 하늘 밑에서 갈갈이 찢어진 거리에는, 전신줄에 목을 매다는 밤바람의 비명이 들릴 뿐.'

오늘 이 밤이 그렇습니다. 북극 한파가 맹위를 떨치면서 온 나라가 냉동고가 됐습니다. 남녘으로는 새하얀 눈이 뒤덮어 땅바닥에 납작 얼어붙었습니다.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마다 잔뜩 웅크린 등이 고양이처럼 동그랗습니다.

폭설이 내리면 알프스 사슴을 떠올리는 사람들처럼, 시인은 '나보다 추운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만큼 추운 당신에게 달린 등잔. 당신 얼굴에 비친 세상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나는 안다.'

평생을 봉사하고 기부하며 살았던 경남 의령의 할머니 '봉사왕'이 마지막으로 시신까지 기증했다는 소식이 엊그제 전해졌습니다. 여든둘에 떠난 공도연 할머니는 그러나 전혀 유복하지 않았습니다. 열일곱 살에 천막집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해 이웃에게 밥을 동냥해야 하는 형편이었지요.

그래도 봇짐장사를 하며 밤낮으로 일해 살림이 나아지자 이웃부터 돌아봤습니다. 보건소가 없는 마을의 부지를 사서 기탁해 송산 보건진료소를 짓게 했지요. 장학금도 내놓고, 한 해도 기부를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3년 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고 노환이 닥친 뒤에도 수레를 끌며 나물 팔고 고물 주워 기부했습니다. 23년을 써 온 봉사일기에 할머니가 남긴 글입니다.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가난의 아픔과 시련을 알지 못할 겁니다. 없는 사람의 비애를 내 이웃들은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 말씀이 차가운 겨울 밤에 뜬 별 같습니다.

'캄캄한 겨울,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12월 21일 앵커의 시선은 '나보다 추운 당신에게'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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