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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그레이 크리스마스

등록 2023.12.25 21:50

수정 2023.12.25 21:53

"크리스마스엔 집에 갈 거예요…"

아내를 앞세운 뒤 홀로 떠돌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에 딸을 찾아옵니다. 하지만 딸은 아버지가 서먹하기만 합니다.

"너는 내가 그리 반갑지 않은 모양이구나."

영화에 흐르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노래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전설' 빙 크로스비의 명곡입니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꿈속에서라도 가족과 성탄을 보내고픈 병사의 갈망을 노래했지요.

"나는 영원토록 고향을 꿈꾸네…"

1914년 크리스마스 이브, 1차대전의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던 서부전선에서 영국군이 잠시 총을 내려놓았습니다. 독일군 참호에서 들려온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합창에 갈채를 보내면서 크리스마스 휴전이 시작됐지요. 병사들은 시신들을 함께 거둬 장례를 치릅니다. 담배와 음식을 나누고 축구를 하고 합동 미사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참혹한 전쟁터마저 따스하게 녹였습니다.

1년 전 공습경보가 내린 우크라이나 키이우 지하철역에서 곱게 차려입은 시민들이 캐럴을 합창합니다. 하지만 표정들이 어둡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캐럴을 부를 겁니다. 다 같이 노래 불러요."

그러나 올해 성탄절에도 전선의 가족은 집에 오지 못했습니다. 

"내 가족을 구해주고 전쟁을 끝내달라고 성 니콜라스에게 편지를 썼어요."

산타의 기원인 성 니콜라스에게 여섯 살 카야도 소원을 빌었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아빠가 크리스마스에는 돌아오게 도와주세요.’

아버지를 전장에서 잃은 열한 살 솔로미야는 성 니콜라스와 천사를 그렸습니다.

그래도 작년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게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포로들에게 가족이 보낸 성탄 편지와 소포를 교환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성탄은 참혹하고 삭막합니다. 이스라엘이 "인도적 휴전을 할 준비가 됐다"고 하면서 기대를 모았던 크리스마스 휴전이 무산됐습니다. 성탄 전야 가자지구 난민촌 공습으로 적어도 일흔 명이 숨졌습니다. 이스라엘군 열다섯 명도 전사해 살육전이 도리어 가열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 나신 베들레헴은 캐럴도, 트리도, 축제도 모두 사라진  어둠에 잠겼습니다.

산타가 40년째 답장을 해주는 독일 우체국에는 올해도 어린이 편지 30만 통이 왔습니다. 그중에 가장 많은 소망은 선물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아닌 '세계 평화' 라고 합니다. 코로나 막바지였던 작년엔 '가족의 건강'이 으뜸이었지요. 전쟁과 재앙에 상처받는 동심 앞에서 어른들이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좋은 일만 가득하고 두려움은 이제 그만. 크리스마스가 왔네요. 전쟁은 끝나요."

40년 전 존 레넌이 평화를 갈구했던 성탄 찬가가 오늘도 간절하다는 건 비극입니다. 은총을 저버리고 전쟁을 부추기는 인간 방종의 끝이 어디일지 두렵습니다.

12월 25일 앵커의 시선은 '그레이 크리스마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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