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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해가 져야 해가 뜬다

등록 2023.12.27 21:50

수정 2023.12.27 21:55

찰리 채플린이 포크와 롤빵으로 '식탁의 댄스'를 춥니다. 행복한 송년 파티에서 사랑하는 소녀의 황홀한 키스에 쓰러집니다. 깨어 보니, 소녀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사이 한바탕 꿈입니다. 소녀는 끝내 오지 않습니다. 명화 '황금광 시대'의 송년은 영화 사상 가장 우울한 해넘이일 겁니다.

게다가 명화 '선셋 대로'의 송년은 기괴합니다. 3류 시나리오 작가가 왕년의 스타 노마의 초대를 받아간 저택에는 그와, 망상에 사로잡힌 그녀 둘뿐이지요. 박차고 나온 그가 조감독 집으로 갑니다. 할리우드의 2류 인생들이 모였지만 왁자지껄 흥겹습니다. 가진 것 없어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면, 한 해를 결코 헛되이 산 게 아니지요.

"우리에겐 할리우드가 멀기만 합니다. 풀장도 없고, 옷도 없고, 남은 건 꿈밖에 없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 건설한 도시 시라쿠사에 이상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한데 뒷머리는 대머리입니다. 발 뒤꿈치엔 날개가 달려 있지요.

그 아래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앞머리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 쉽게 붙잡을 수 있게 하고, 뒷머리는 내가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게 하려는 것. 발에 날개가 달린 건, 순식간에 사라지려는 것이다. 내 이름은 '기회'다.'

아라비아 격언에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내뱉은 말, 쏘아버린 화살, 지나간 세월, 그리고 저버린 기회' 입니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새 마음으로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새로운 새해가 불쑥 다가왔습니다. 지난 한 해, 함부로 내뱉은 말로 남의 가슴에 쏜 화살이 한 둘이 아닙니다. 시간과 기회를 허송하며 내 가슴에 꽂힌 후회의 화살들이 욱신욱신 들쑤십니다.

'지나간 계절은 모두 안개와 바람.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

그 외롭고 쓸쓸한 시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애틋하게 떠오릅니다.

'기러기 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그러나 해가 지면 별이 뜨고, 해넘이를 지나면 해돋이가 옵니다. 묵은 해와 새 해의 경계에 서면 좌절과 부정을 딛고 일어서는 사색과 긍정의 힘이 솟습니다. 그 꿈과 희망의 시선은 함께 사는 이웃으로 향하기 마련이지요.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물어보기. 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

작고 당연한 것들이 축복으로 다가오는 세밑입니다. 남의 가슴에 쏜 화살, 내 가슴에 박힌 화살 모두 뽑아내고 빈 가슴, 맑은 머리로 새해를 맞아야겠습니다.

12월 27일 앵커의 시선은 '해가 져야 해가 뜬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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