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체

[취재후 Talk] '박상기의 난'과 '은성수의 난'

등록 2021.04.23 14:00

수정 2021.04.23 14:23

인터넷 가상화폐 커뮤니티에서 자주 거론되는 인물로는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이 첫 손에 꼽힌다.

가상화폐 광풍이 몰아쳤던 2018년 1월, 문재인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이던 그가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까지 목표로 하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했다.

시장이 발칵 뒤집혔다. 2500만원대까지 올랐던 비트코인 가격이 한 달 새 1400만원대로 반토막 났다. 손해를 본 투자자들이 속출했고, 코인 시총 100조원이 날아갔다. 가상화폐 투자자들 사이에선 '박상기의 난'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자주 오르내린다.

지난 3년을 되돌아본다. 당시 투자자들의 반발에 부딪혔던 정부는 결국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거래소 폐쇄를 목표로 한다는 '법안 준비'도 없던 일이 됐다.

그 사이 정부가 '가치없는 돌덩이'에 비유했던 가상화폐는 몸집을 불렸다. 당시 1400~2100만원 사이를 오가던 비트코인은 최근 8000만원까지 치솟았다. 가상화폐 하루 거래액이 25조원을 넘겨 코스피 시장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정부가 이번에는 '특별단속' 카드를 꺼내 들었다. 6월까지 가상화폐 출금 과정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다단계나 투자사기 등 불법행위를 단속하겠다는 식이다.

투자자 보호 대책은 없었다. 정부는 가상화폐를 '화폐'로도 '금융'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시장 관리에 나섰다가는 정책 기조가 흔들리는 거라고 보는 듯 하다.

시장은 무덤덤하다. '학습 효과' 덕분이다.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지자 투자자들은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라며 '줍줍'에 나선다.

정부 대책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책 발표 직후에 상장된 한 가상화폐는 30분만에 1000배가 뛰었다.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오죽하면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미쳤다"는 말이 나왔다.

3년 전 '박상기의 난'을 겪은 한 투자자는 "3년 간 뭐하다 이제와서 대책이라고 내놓나. 정부가 참 무능하다"고 했다.

정부가 손 놓은 사이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가상화폐가 거래소에 우후죽순 상장되고, 투자자의 돈을 끌어모은다. 2030 청년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코인을 주식 거래하듯 사고 판다. 수수료로 수익을 올리는 거래소들이 '코인 광풍'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취재후 Talk] '박상기의 난'과 '은성수의 난'
해킹 피해자 신 모씨 가상화폐 계좌


사기꾼들은 이 판을 그냥 지나칠 일 없다. 30대 남성 신 모씨의 가상화폐 계좌. 총 5000만원 어치 코인이 있었는데, 하루 아침에 4000만원 어치가 빠져 나갔다.

비슷한 피해자가 100여명에 달한다. 2억원을 날린 사람도 있다. 이들은 해킹 피해를 주장하지만, 거래소는 부인한다. 금융당국은 금융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해줄 게 없다고 한다.

신 씨는 "규모가 큰 거래소조차 보안이 안 갖춰졌는데, 정부는 대책 없이 세금부터 걷겠다고 한다"며 한탄했다.

 

[취재후 Talk] '박상기의 난'과 '은성수의 난'
은성수 금융위원장 / 연합뉴스


투자자 보호에 무책임하다는 지적에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22일 "가상자산에 투자한 이들까지 정부에서 다 보호할 수 없다"며 가상화폐를 "내재가치가 없는 가상자산"이라고 못 박았다.

오는 9월 가상화폐 거래소가 대거 폐쇄될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금융당국 책임자의 한 마디가 '제2의 박상기의 난'이 된 걸까.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은성수의 난'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한 여당 의원은 거래소 폐쇄를 운운하는 건 시장에 혼란을 줄 거라며 황급히 민심을 달랜다.

23일 대장주인 비트코인부터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끌어올린 도지코인까지 가상화폐가 줄줄이 흘러내린다. 비명이 넘쳐난다. 안이한 처방만 되풀이하다, 결국 '폭탄 돌리기'가 뒤늦게 뛰어든 개미들에게서 터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한 금융 전문가는 "정부가 가상화폐 실체를 인정하고 제대로 규제, 관리하면 되는데 왜 시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말로 그치는 처방은 통하지 않는다. 거래소 관계자조차 "가상화폐 투자자가 250만명에 달하는데 정부가 제대로 건드릴 수 있겠나"고 한다. 맞는 말처럼 들려 씁쓸하다.

'가상'이라는 불확실성과 '화폐'라는 현실적 유혹의 모순을 '은성수의 난'은 어떻게 정리할까 궁금하다. / 이정연 기자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