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전체

[윤정호 앵커칼럼] 삼일절 밤에 내리는 봄비

등록 2017.03.01 20:34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겨울바람이 아직 코끝에 맵싸합니다. 봄은 멀리서 멈칫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삼월 첫날입니다.

이 무렵 사람들은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고랑에 파릇파릇 돋아난 보리를 시린 발로 밟습니다. 어린 보리에 상처를 냅니다. 그러면 보리가 웃자라지 않습니다. 뿌리도 더 단단히 내립니다. 함께 밟은 땅도 서릿발에 들뜨지 않습니다. 꽃샘추위 견디는 생명력을 더합니다. 밟으면 밟을수록 보리밭은 푸르러집니다. 밟을수록 따스한 봄이 옵니다.

숲도 아직은 겨울입니다. 새잎 하나 없이 메말랐습니다. 응달엔 두꺼운 얼음이 고집스럽게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무들은 어딘가 때깔이 다릅니다. 높다란 가지 끝이 발그레합니다. 잎눈, 꽃눈을 맺느라 가려운 모양입니다. 

겨울은 물러날 차비를 했지만, 봄 역시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긴 순순히 오는 봄이 언제 있었던가요. 시인이 노래했듯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던가요. 삼월을 여는 삼일절 밤, 광장이 군중과 함성과 구호로 뒤덮였습니다. 반으로 쪼개져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삼일 만세는 마른 대지에 들불처럼 타오른 민족혼의 승리였습니다. 태극기는 수난의 근대사를 지나면서도 민족을 하나로 묶어준 등불이었습니다. 그 삼일절, 그 태극기가 분노와 증오의 삿대질로 편이 갈렸습니다. 봄은 병(病)입니다. 가려움증처럼 움트고, 발열하듯 꽃 피고, 어지럼증같이 아지랑이 입니다. 지금 광장은 호된 봄치레를 하고 있습니다. 해빙(海氷)의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밤 사이 봄비가 내립니다. 가늘어 숨죽인 채 가만히 내려 적십니다. 반목과 대립으로 달아오른 아스팔트를 식혀줄 겁니다. 이제 곧 시름 풀리듯 얼음 녹아, 계곡과 개울마다 싱그러운 봄노래를 부르겠지요. 불어난 강물이 천둥 치듯 소리 지르며 흘러가겠지요. 겨울이 춥고 길수록, 봄꽃은 화사하고 향기롭습니다. 시인의 보리밟기 노래로 맺습니다.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정희성 답청/踏靑)

앵커칼럼 ‘삼일절 밤에 내리는 봄비’였습니다.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