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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동욱 앵커의 시선] 전등 끄는 일자리

등록 2019.03.12 21:44 / 수정 2019.03.1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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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나온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입니다. 배우 천호진이 아들 권상우의 성적표를 내던지며 꾸짖습니다. 

"너, 대학 못 가면 뭔 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잉여인간 알아? 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

잉여란 '쓰고 남은 것'을 뜻하니까 잉여인간은 '남아도는 인간' 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빈둥빈둥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축내는 인간 유형을 가리키는 말로 등장했지요. 우리에겐 6.25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손창섭의 단편소설로 익숙합니다.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에는 취업을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청춘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자조하는 용어로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잉여인간이 미래학의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인류가 잉여 하층민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예측과 우려가 쏟아지고 있는 겁니다.

스웨덴에서는 이런 미래 잉여인간을 위한 기상천외한 일자리 실험이 진행 중입니다. 프로젝트 이름은 '영원한 고용'. 2026년 완공될 열차 역에서 일할 종신 직원 한 명을 모집한다고 합니다.

이 직원이 할 일은 아침에 출근해 승강장 등을 켜고 퇴근 때 등을 끄는 게 전부입니다. 잠을 자든, 게임을 하든, 외출해 영화를 보든 상관 없습니다. 종일 빈둥거리며 받는 월급이 우리 돈 260만원쯤이고 급여 인상, 휴가, 퇴직연금도 보장합니다. 이 환상적 일자리의 취지는 인류 문명의 진보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노동의 본질과 가치는 무엇인지 고민해 보자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뉴스를 접하면서 좀 엉뚱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연말 우리 정부가 내놓은 공공 일자리 가운데 대학 빈 강의실 전등 끄기 말입니다. 한 달에 30만 원 가량을 받고 빈 강의실 전등 끄러 다녔던 이 땅의 젊은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자신이 이 사회의 잉여인간이라도 된 듯한 자조감에 빠지지는 않았을지요. 거기에 비하면 노동의 종말을 경고하는 스웨덴의 잉여인간 일자리는 차원이 달라도 많이 달라 보입니다.

3월 12일 앵커의 시선은 '전등 끄는 일자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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