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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취재후 Talk] 밀레니얼 세대와 검은 세력들

등록 2019.07.21 10:42 / 수정 2019.07.2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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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와 혁신위원 9명이 지난 1일 임명장 수여식을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출처 : 바른미래당

90년생 스물아홉살 장지훈씨는 전남 순천 출신으로 국민의당 청년부대변인과 바른미래당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직함은 바른미래당 혁신위원이다. '본업'은 학생으로, 고려대 정책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생계는 '알바'로 해결한다.

장씨가 속한 혁신위는 65세 위원장을 제외하면 평균 나이 35살로 요즘 꽤 '핫'하다는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s)에 해당한다. 그들 스스로도 'U-40'이라 부른다.

지난 6월말 바른미래당 혁신위가 구성되자 언론은 타성적으로 움직였다. '혁신위'란 표현 자체가 이미 식상한 탓이다. 기자들은 "구성원이 누구냐"를 알아보기 전에 "누구의 추천이냐"부터 따졌다. 현상을 분석·기록하는데 독립변수와 종속변수가 서로 뒤바뀌었다. 나이까지 어리다고 하니 더욱 위원 본인보다는 배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유승민계' '안철수계' '손학규계'란 표현이 다시 등장했고, 여느 위원회처럼 '당권파'와 '퇴진파'가 4:4로 구분된 '그럴듯한' 대진표가 완성됐다. 물론 이런 식의 계파분류 작업에 당사자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그리고 금방 잊히기 마련이다.

그럭저럭 뻔하게 잊힐 뻔했던 혁신위는 현재 당 내홍(內訌)의 중심에 있다. '지도부 재신임 여론조사'란 내용이 담긴 1차 혁신안을 발표하기 직전 주대환 혁신위원장이 사퇴하면서, 이른바 '당권파'와 '퇴진파' 사이 갈등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표결로 결정된 '1호 혁신안'은 당 최고위원회에 상정되지 못했다.

후임 위원장 인선은 미뤄졌고, 혁신안도 계류 중이다. 혁신위원 가운데 '그나마' 최연장자(40세)인 권성주 위원은 일주일 넘게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주대환 위원장은 사퇴 회견에서 "젊은 혁신위원들을 뒤에서 조종해 당을 깨려는 '검은 세력'에 크게 분노한다"고 폭로했다.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이어졌다.

조용술 혁신위원은 사퇴 기자회견 후 "당의 유력인사가 (손 대표 퇴진 관련) 혁신안건을 논의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했다. 임재훈 사무총장은 "바른정당계의 중추적 의원"을 지목했고, 일부 지역위원장들은 "검은 세력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준석 최고위원은 "위원장 사퇴에 다른 방향에서 검은 세력이 개입한 것 아닌가"라고 반박하며 손학규 대표를 겨냥했다. '유력인사'로 지목된 바른정당계 의원들 대부분은 이를 부인하거나 답을 피했다. 오신환 원내대표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제가 좀 검나?"라고 되물었다. 

바른미래당 혁신위원들이 지난 19일 혁신안의 최고위 상정이 무산되자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 '바미스러움'과 이변

당 내홍에 제3자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없다. 그만큼 복잡한 셈법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게 정당이다. 제3정당은 오죽할까. 이미 '내홍'이란 단어는 바른미래당이란 당명과 관용어로 묶인 상태다.

다만 주목할 부분은 이들이 벌이는 반목과 투쟁의 과정이다. 기존의 정치행태나 언어와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

바른미래당 관계자에 따르면 혁신위는 6월 30일 설치 후 열흘 동안 5차례에 걸쳐 25시간 넘게 회의를 했다고 한다. 각 회의당 평균 5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검은 세력'이 개입을 했든 안 했든 참석자들 사이 수시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는 사실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이들은 토론 막판 혁신안 표결 여부를 두고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표결을 할지 말지에 대한 표결'을 먼저 했다고 한다. 기시감이 있는 장면이다. 지난 4월 바른미래당은 의원총회에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추인 여부를 두고 표결을 3분의 2로 할지, 과반으로 할지를 별도 표결로 결정한 바 있다. 요즘 정치권에선 이런 결정장애적 갑론을박(甲論乙駁)에 '바미스럽다'는 수식어를 붙인다.

'바미스러운' 의사결정 과정에서 '작은 이변'이 발생했다. 4대4 동수로 부결될 줄 알았던 혁신안이 5명의 찬성으로 통과가 '돼버린' 것이다.

기성 정치권의 시각에선 이를 일종의 '배신' 또는 '일탈' 행위로 재단해버리면 간단하다. 정략과 음해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변절자가 발생했다는 결론만큼 쉬운 분석이 없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당초 이들 혁신위원들은 누군가의 말을 따를 사람들이 아니었다. 좀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 한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꽂아준' 영감에게 충성을 다하고, 그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따위의 프로세스는 밀레니얼 위원들에겐 딴 나라 얘기였다. 원래 바른미래당의 DNA 자체가 '반골(反骨)' 아니었던가.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가 지난 15일 당 대표실 앞에서 단식농성 중인 권성주 혁신위원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다. / 조선일보 DB


■ 밀레니얼式 투쟁

주대환 위원장의 추천을 받아 혁신위원이 된 김지나 위원은 지금도 자신의 정확한 임명 경위를 잘 모른다고 한다. 그는 기자들의 '타성적 관측'에 따라 범(凡)손학규계로 분류됐지만, 결국 혁신안 표결 때 예상과 반대로 '찬성'에 손을 들었다. 지금도 그는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는 반응이다.

혁신안 최고위 상정을 시도했던 첫날 회의장 앞엔 권성주·이기인 위원 2명뿐이었다. 혁신위 '간사'를 맡은 장지훈 위원에게 '왜 그날 함께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알바' 시간과 겹쳐 부득이 못 왔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혁신위원 5명은 최근 '검은 세력들'이란 타이틀로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자신들의 '배경'을 의심하는 이들을 향해 스스로 '검은 세력'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장지훈 위원은 일주일 내내 위아래 검은 옷만 입고 다닌다. 유쾌한 역발상이라고 해야 할지, 철없는 패기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짜장면 먹은 것 아니냐"는 조롱에도 초연한 표정을 유지했던 권성주 위원은 유승민 의원이 찾아오자 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성정치에 저항하는 밀레니얼 정치인들이 결국 구태 정치 행위 중 하나로 꼽히는 단식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역설적이다. 지난해말 '목숨을 건' 단식으로 연동형 비례제 합의를 이끌어낸 손학규 대표는 이젠 '단식의 대상'으로서 이 난제를 풀어야 한다.

바른미래당 혁신위원들이 지난 16일 '검은 세력들'을 자처하며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다. / 제공 : 바른미래당 이기인 혁신위원


■ 손학규의 숙제

십수 년 전 기자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정치인 손학규란 이름 석자는 '혁신'과 '변화' 그 자체를 상징했다. 당시 대선 후보 중 언론인이 뽑은 부동의 1위는 늘 손학규였다. 경기지사 임기를 끝내고 곧바로 100일 동안 전국을 돌며 '민생대장정'을 했고, 새 정치세력을 위해 '불쏘시개'를 자처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선거 패배 후엔 미련 없이 강원도에서 칩거하거나 전남 강진의 토굴로 향했다. 바른미래당과 제3정당의 꿈은 어쩌면 그의 마지막 정치 승부수가 될 것이다.

재야 노동운동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주대환 전 위원장은 최근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각종 담론을 제시해왔다. 그는 위원장직 사퇴 직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손학규 끄나풀'이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의 앞잡이'라고 했다. "기성세대가 젊은 리더들을 전위대로 소모하는 부분이 안타깝다"며 "정치권의 젊은이들에게 다소 실망했다"고 했다. 다만 "결국은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다"고 했다. 그의 입장에선 혁신위 자체가 정말 답답했을 터다.

이념의 갈등도 아닌, 그렇다고 정치 세대 간의 갈등이라 규정하기도 애매한 이 싸움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어주긴 어렵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25석 제3정당의 단순 내홍 정도로 보기엔 그 잠재적 여파가 생각보다 크다.

내년 총선 전 정계개편은 이미 명약관화(明若觀火)다. 다만 그 뇌관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가 관건이다. 민주평화당이 사실상 분당(分黨) 수순에 들어갔고, 여기저기서 '제3지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자강'과 '혁신'을 강하게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마음 속으론 딴 마음을 품는다는 비아냥 섞인 관측도 있다. 기성 정치 구도에선 지금이야말로 '주판알'을 열심히 굴리며 '줄서기'에 집중해야 할 때다. 또 다른 관점에선 이번 사태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딱 '바미스럽게' 끝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국회 정상화보다 더 어렵다는 게 바른미래당 정상화라고 한다.


■ 검은 세력들

난세의 영웅들이 군웅할거(群雄割據)하는 다당제의 시대다. 천하의 영웅호걸은 그만큼 찾기 어려워졌다. 나이가 혁신과 구악(舊惡)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되진 않는다. 초로(初老)에도 누구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가 있고, 나이만 젊은 꼰대도 많다. 타성에 젖은 모두가 '검은 세력들'이다.

내년 총선은 누가 제대로 혁신하느냐의 싸움이다. 관성과 타성에 젖은 행태로는 여(與)든 야(野)든 필패할 수밖에 없다. '미래가 안 보이는' 바른미래당의 갈등은 지금도 정치권을 배회하는 수많은 '검은 세력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김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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