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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동욱 앵커의 시선] 윤정희 그리고 백건우

등록 2019.11.11 21:48 / 수정 2019.11.1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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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방, 커튼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듭니다. 여든이 넘은 피아니스트가 슈베르트 즉흥곡을 연주합니다. 여리고 잔잔한 선율에 빛과 어둠이 엇갈립니다. 아내 없는 삶을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음악가 남편이 지켜봅니다.

"소금통이 비었네"

그러나 아내는 초점 잃은 눈으로 식탁만 내려다봅니다.

"여보, 나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여보 제발… 안느, 내 얼굴을 봐" 

영혼마저 잿빛으로 시드는 치매 앞에서 남편은, 영원할 줄 알았던 것이 영원히 사라졌음을 깨닫습니다. 이 익숙한 멜로디는 리스트가 연인에게 바친 '사랑의 꿈' 입니다. 언젠가 피아니스트 백건우 독주회에서 아내 윤정희가 남편을 바라보며, 남편의 연주에 맞춰 낭랑한 목소리로 읊었던 그 노래입니다. 

별처럼 빛나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피아니스트의 아내로 살아온 지 43년. 윤정희는 웬만해서는 미용실에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몇 십 년을 이렇게 남편이 잘라주고 매만져 줬습니다. 부부는 '백건우를 뺀 윤정희' '윤정희 없는 백건우'를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늘 함께 다녔기에 휴대전화도 한 대를 같이 썼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가리켜 "평생 꿈만 꾸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도 "삶의 마지막 모습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꿈꾸며 가고 싶다"고 했지요. 그 아내가 5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남편은 밝혔습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영화 '시'에서 연기한 주인공이 치매를 앓는 할머니였지요. 그녀는 이제 딸도 잘 알아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딸에게 "오늘 촬영은 몇 시냐"고 묻곤 한다는 말에서는 슬프게도 명화 '선셋대로'의 흘러간 여배우 노마를 떠올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했던 여배우가 어둠에 갇힌 모습을 생각하면 늦가을 찬바람처럼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하고 스산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아프고 난 뒤 피아노 소리도 달라졌다"는 남편의 말에서 그나마 따스한 위안을 받습니다. 어둠 속 아내에게 남편은 한 줄기 빛이 돼줄 겁니다. 부부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11월 11일 앵커의 시선은 '윤정희 그리고 백건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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