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원전 / 연합뉴스
월성 1·2·3·4호기를 차례로 지나자 높이 6.5m의 하얀 원통형 다발들이 빼곡했다. 사용후핵연료를 임시 보관하고 있는 건식저장시설, 캐니스터다. 핵분열을 마치고 나온 사용후핵연료는 강한 방사선과 높은 열을 배출한다. 이걸 습식저장시설에 넣고 열을 식힌 뒤 건식저장시설로 옮겨 임시 보관하는 것이다. 빽빽이 줄지어선 캐니스터는 모두 300기. 총 16만2000다발(1기에 540다발)의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할 수 있다. 이미 2010년 가득 차 밀봉된 상태다.
캐니스터 옆으로 몇 걸음 옮기자 직육면체형 콘크리트가 보였다. 요즘 원자력계에 뜨거운 감자가 된, 맥스터다. 맥스터는 캐니스터보다 더 조밀하게 보관할 수 있는 건식저장시설이다. 모두 7기인데, 1기에 2만4000다발이 보관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봉인된 실린더가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7기 중 6기는 이미 가득 찼고, 1기는 1/4만 비어있었다.
임시저장시설 밖으로는 방사선이 누출되지 않는다고 한다. 맥스터 외벽 바로 옆 방사선 측정기 숫자는 0.016밀리시버트(mSv)를 표시했다. 기준치(0.025mSv)보다도, 엑스레이 한 번 찍을 때 노출량(0.1mSv)보다도 낮다. 서울의 평균 방사선량은 0.119mSv다.
■ 갈 곳 없는 핵폐기물…97% 포화 상태
캐니스터는 이미 100%, 맥스터는 96.4%가 찼다. 건식저장시설 전체로 따지면 포화율은 97.6%에 달한다. 2022년 3월이면 포화상태가 된다.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은 현재 7기인 맥스터를 14기로 증설할 계획이다. 공사만 19개월가량 걸릴 것으로 본다. 역산하면 늦어도 올 8월엔 착공해야 한다. 문동석 한수원 월성1발전소 사용후핵연료사업팀장은 "공사 기간 중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착공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할 곳이 없으면 월성 2~4호기 가동을 멈추는 수밖에 없다. 3기의 설비용량만 우리나라 전체 발전 용량의 1.7%. 전력 생산량으로 보면 대구·경북 전체 전력 소비량의 20%에 달한다.
19일 경북 경주시 경주역 앞 광장에서 '월성원전 핵쓰레기장 추가건설 반대 경주시민대책위' 관계자가 천막농성과 서명운동을 통해 '월성원전 사용후 핵연료 임시저장시설(맥스터)' 추가 건설 반대운동을 펴고 있다 / 연합뉴스
■ 골든타임 3개월인데…끝 안 보이는 갈등
예견된 사태였다. 한수원은 2016년 일찌감치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맥스터 증설을 신청했다. 원안위도 올해 1월 이를 승인했다. 하지만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했다. 정부가 작년 5월 국정과제로 '사용후핵연료 재검토위원회'를 출범하면서 맥스터 증설 등을 공론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재검토위는 이번 달부터 경주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의견수렴 절차에 들어갔다.
찬반 논란은 뜨겁다.
탈핵 단체와 반대 주민들은 맥스터 증설은 경주를 핵폐기물 쓰레기장으로 만들겠단 것이라며 반대서명에 들어갔다. 이들은 "정부가 약속대로 핵폐기물을 다른 도시로 이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백민석 양남농협조합장(전 양남면발전협의회장)은 "정부가 중장기적 로드맵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며 "최종처분장이나 중간저장시설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월성 원전이) 영구폐기장이 되고 말 거라는 불안감이 크다"고 했다.
19일 경북 경주시청 앞에서 노희철 원자력노동조합연대 의장이 '월성원전 사용후 핵연료 임시저장시설(맥스터)' 건설에 찬성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반면 원자력계와 찬성 주민들은 지역 경제를 위해서라도 빨리 착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중표 양남면 나아리 이장은 "월성 1호기 조기폐쇄로 이미 인근 상가 70여 곳이 문을 닫을 정도로 지역경제가 황폐해졌다"며 "맥스터 증설을 못해 2·3·4호기 마저 문을 닫는다면 무덤을 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수원 노조도 원전 노동자의 고용안전을 위해서라도 맥스터 증설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공론화 자체도 논란이다. 아이러니한 건 공론화가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탈핵단체는 '졸속'이라 하고, 원자력계는 '시간 끌기'라 한다. 탈핵단체들은 참여단 구성부터 절차의 투명성까지 문제가 있다며 공론화를 중단하라고 주장한다. 원자력계는 애초 맥스터 증설이 공론화 대상이 아니라며 "법적 근거가 없는 공론화 절차 때문에 당장 필요한 맥스터 증설이 시작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일각에선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가 시간을 끌며 원자력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단 지적도 나온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정부가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지연하고 원전 내에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을 가득 찰 때까지 미뤄서 결국 원자력 발전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이라고 했다. 성풍현 카이스트 원자력및양자공학과 교수는 "맥스터 증설은 한시가 시급한 사안인데 정부가 주민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게 아니냐"고 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는 "맥스터의 안전성이나 효율성은 이미 30년 전 검토가 끝난 사안"이라고 했다.
재검토위는 올 6월말까지 결론을 내는 게 목표다. 하지만 맥스터 증설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윤석 재검토위 대변인(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은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100% 일정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맥스터 /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 급한 불 끈다 해도…"고준위 방폐장은 언제?"
만약 맥스터 7기를 더 늘리기로 최종 결론 난다면 사용후핵연료 16만8000다발을 추가 저장할 수 있게 된다. 급한 불은 끌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맥스터는 말 그대로 '임시' 저장 시설이다. 약 40년 뒤에는 결국 중간저장을 거쳐 영구처분시설로 옮겨야 한다. 핵폐기물을 주민 생활권으로부터 완전히 격리하는 작업이다.
전문가들은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에 대한 로드맵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영구처분시설을 2053년부터 가동하겠다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관리 기본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현 정부가 이를 백지화했다. 이 또한 국민 의견 수렴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역시 시간이다. 다른 원전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빛 원전은 예상 포화시점이 2026년, 고리 원전 2027년이다. 시간이 그리 길게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공론화 작업이 언제 끝날지 가늠조차 어렵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황주호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사용후핵연료를 처리하지 못하면 '변기 없는 아파트'나 다름없다"며 "중장기적으로 사용후핵연료를 포함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절차를 법제화하는 일을 빨리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맥스터와 별도로 중장기 관리방안 마련을 위한 의견수렴 절차도 막을 올렸다. 시작부터 녹록지 않다. 오리엔테이션이 열린 지난 23일, 울산에서 한 탈핵단체가 현장을 불법 점거하고 항의시위에 나섰다.
공론화가 공회전 하는 사이 소중한 시간은 흘러만 가고 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지만 골든타임이 걸린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속도도 방향도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은 둘 다 놓치고 있는 듯하다. 해법도출이 아닌 찬반 문제에 매몰된 채 말이다.
역대 정부는 1983년부터 10여 차례 사용후핵연료 해법 찾기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국내 최장기 미해결 국책사업이란 오명이 붙은 이유다. 이대로라면 결국 다음 정권에서 '재재검토위'가 출범할지도 모를 일이다. / 임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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