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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참 어리석다

  • 등록: 2020.09.14 21:51

  • 수정: 2020.09.14 21:59

 "살려라! 살려라!"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로마 장군 막시무스가 검투사로 돌아오자 관중이 외칩니다. 황제도 어쩔 수 없이 엄지를 치켜들어 살려주라고 합니다. 막시무스가 최고 검투사를 물리쳤을 때는 관중이 이렇게 연호합니다.

"죽여라! 죽여라!"

황제는 엄지를 아래로 내려 패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합니다. 권력의 손가락 신호에 사람 목숨이 달린 시대였지요. 추미애 장관 아들 의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떠올린 장면입니다.

독일 희극배우 베크만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그는 연극평론가를 모욕했다가 "평론가 집에 찾아가 사과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증인들과 함께 기다리던 평론가의 집 초인종이 울리고, 베크만이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물었습니다. "상인 슐체씨 집이 여깁니까?" 평론가가 얼결에 아니라고 하자 베크만은 "대단히 실례했습니다"라며 정중하게 사과하고 달아났습니다.

이건 사과인가요, 아닌가요.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황희 민주당 의원이 추 장관 아들의 의혹을 제보한 27살 청년의 이름과 사진을 공개하며 단독범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한 거지요. 권력형 의혹을 고발한 시민의 신상을 밝히고 범죄자로 모는 것은, 공직자로서 마지막 도리를 저버린 짓입니다.

여당 내에서까지 "제정신이냐"는 말이 왔습니다. 공익신고자 보호는 김대중 정부 이래 민주당 주요 정책이기도 합니다.

"공익신고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신고자 신분 노출을 방지하는 등…"

하지만 그 약속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 다르게 적용된다는 사실이 이번에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이 제보자는 이미 당당하게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황 의원의 발언이 신호탄이 되기라도 한 듯 갖은 협박과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진중권씨의 말처럼 "황의원이 지지층에게 공격의 좌표를 찍어줬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권력이 아무리 부패한다고 한들 누가 용기 있게 나서겠습니까? 추 장관의 뒤늦은 사과 역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핵심적인 의혹은 다 비껴간 채 가타부타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검찰 개혁을 언급했습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도 처음 입을 열어 "추 장관이 충정을 말씀해주셨다"고 했습니다.

"진실은 검찰 수사로 밝혀야 합니다…"

집권당 대표가 그리고 법무부 장관이 이렇게 얘기하는데 어떤 검찰이 진실규명에 용기 있게 나설 수 있을까요? 더구나 지금 검찰은 이미 여덟 달을 허비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진실은 결코 그 본색을 숨길 수 없습니다. 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지요

9월 14일 앵커의 시선은 '참 어리석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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