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 미국 워싱턴에서 첫 정상회담을 가진 후 공동성명을 통해 양국 간 '미사일 지침'의 종료를 선언했다. 1979년 10월 제정된 미사일 지침은 미국의 미사일 기술 이전 대가로 우리나라가 개발하는 미사일의 사거리와 탄두 중량을 제한하는 국가 간 가이드라인이었다.
주권이 일부 제한되는 이 가이드라인은 역설적이게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주국방' 노선으로 인해 생긴 지침이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진 이래 한미동맹은 국제 정세에 따라, 양국 국내 정세에 따라 때론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던 시기도 있었다. 1969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국민적 피로도를 의식해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앞으로 미국이 유럽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적극적 역할을 맡기는 힘들다고 판단해, 동맹국들의 자주국방능력 강화와 미국의 부담감축 방침을 천명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0년 월리엄 로저스 미국 국무장관이 "주한미군 2만명 철수"를 통보했고, 1971년 4월 2일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 주둔했던 주한미군 7사단 2만여명이 미국으로 철수했다.
당시 한국은 전후 복구가 20년도 채 되지 않았고, 북한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에서 열세였다. 심각한 안보공백을 우려한 박 전 대통령은 비대칭 전력으로 최전방에서 평양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 200km의 탄도미사일 개발을 극비로 진행시켰다.
국방과학연구소(ADD)는 기밀 유지를 위해 대외적으로 기계공업 회사인 것처럼 꾸미고, 연구원들을 용산구 이촌동 일대 아파트에 거주시키며 외부 접촉을 차단한 채 연구에 매진했다. 풍동 시험시설이 없어 미국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 외형을 베끼고, 고체 연료를 위해 적자로 폐쇄한 미국의 유도탄 추진체 공장 시설을 헐값에 사오고, 전방위 외교전을 펼쳐 프랑스 업체로부터 추진체 기술을 확보했다. 결국 1978년 9월 26일 충남 안흥시험장에서 백곰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해 세계 7번째 지대지 탄도미사일 개발국이 됐다.
그러나 미국은 한반도의 군비 경쟁과 긴장 고조를 원하지 않았다. 1979년 9월 존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이 탄도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라는 권고 서한을 보냈고, 이에 대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서면으로 동의하며 사거리 180 km, 탄두중량 500 kg으로 제한하는 미사일 지침이 생겼다.
대신 미국의 미사일 기술을 점진적으로 이전받을 수 있었다. 대전차 로켓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국방기술 여건에서 탄도미사일을 자체 개발하겠다는 자주 국방 노력이 결국 동맹국 미국의 기술 이전을 얻어낸 셈이었다.
재작년 미사일지침 완화에 따라 한국은 현재 탄두중량 2톤의 '괴물 벙커버스터' 현무4를 보유하고 있다. 이제 미사일지침이 완전 해제되면서 탄두중량과 사거리에 제한을 받지 않는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오는 10월엔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의 발사가 예정되어 있다. 국내 독자기술로 만들어진 발사체를 단 누리호는 1.5t급 인공위성을 고도 600~800㎞ 저궤도에 올려놓는 게 목표다. 누리호를 통한 독자 우주 발사체 개발이 국방 분야에 가져올 1차 파급효과는 감시, 정찰 위성 개발이지만, 우주발사체는 다른 기술을 조금만 접목시키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전환할 수 있다. / 윤동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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