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얼룩진 비단 속적삼을 집어 든 연산군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피의 흔적에서 어마마마의 처량한 곡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월탄 박종화가 역사소설 '금삼의 피'에서, 연산군이 폭군으로 표변하는 순간을 묘사한 대목입니다. 폐위된 어머니가 사약을 마시며 토했던 피를 보는 순간 이성을 잃고 복수심에 눈이 먼다는 설정이었지요.
자서전이 삶을 돌아보는 주관적 술회라면, 회고록은 역사적 사건의 내막과 진상을 담아내는 기록입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가 "판사에게 신문을 받는다는 심정으로 썼다"고 했듯, 회고록은 '역사 법정의 최후진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극작가 차범석은 "자신을 처형대에 올려놓을 용기와 겸손으로 거짓의 가면을 벗어던져야 회고록을 쓸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조국 전 장관이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 내려가는 심정으로 썼다"는 회고록 '조국의 시간'이 서점에 나오기도 전에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일단 '피'라는 단어에서부터 격한 감정이 느껴지고 이 책의 성격을 짐작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는 "허위사실이 압도적으로 전파돼 있어서 최소한의 해명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뇌물수수, 위조공문서 행사를 비롯한 열한 가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부인 정경심씨는 1심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법정구속 됐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인 재판 때마다 증언을 거부했습니다. 하루 세 시간 재판에서 "묵비권 조항에 따르겠다"는 말을 삼백세 차례 반복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책을 써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나선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친조국 세력은 그동안 조국 가족의 입시비리 혐의를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로 돌렸습니다. 어느 소설가는 '예전 정권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못 되는 사건'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조국 가족의 피'를 뜻하는 신조어 '조족지혈'이 등장했습니다. 전혀 다른 두 '조족지혈' 사이 괴리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요. 책은 벌써 수만 권이 예약 판매될 정도로 강성 지지층의 반응은 뜨겁습니다.
민주당의 대권주자들까지 이 열광에 호응하면서 '조국의 시간'이 다시 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조 전 장관은 "나를 밟고 전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지난 '조국의 시간'이 국민들에게 어떤 상처를 안겼는지 벌써 다 잊었냐고, 그리고 그 사건들이 대한민국의 공정과 정의를 얼마나 후퇴시켰는지 벌써 다 잊었냐고 5월 31일 앵커의 시선은 '다시 조국의 시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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