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 시인 파울 첼란이 운명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가 선 줄은 가스실로 가는 행렬이었습니다.
그는 보초가 한눈을 파는 사이 슬그머니 빠져 나와, 작업을 나가는 줄에 붙었습니다.
가스실 인솔자는 머릿수를 헤아려 한 명이 모자라자, 작업 줄 맨 앞 남자를 불렀습니다.
남자는 대신 가스실로 갔고, 첼란은 죄의식에 시달리다 세느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시인은 첼란의 이야기를 전하며 "줄들 잘 서라"고 했습니다. "자, 줄에 붙어, 먹고 살려면. 요즘엔 굵은 줄에 붙는 게 중요해"
줄 세우기 중에서도 잔인한 것이 예전 군대의 선착순 얼차려입니다. "이것들이 기합이 빠져가지고, 선착순 한 명"
열 명에게 '연병장 돌기, 선착순 한 명'을 시키면, 한 바퀴 돌 때마다 일등 한 명씩 빼주니까, 꼴등은 열 바퀴를 계속 뛰어야 합니다. 남을 눌러야 내가 사는 게임이지요.
어제 50대 후반 352만명 전체를 대상으로 모더나 예약을 받던 질병관리청 페이지에 새벽 세 시 반쯤 접속한 화면입니다.
대기자가 앞에 80만 명, 뒤에 3만 8천여명이 있다며 9일을 기다리면 접속된다고 알립니다.
그러더니 열네 시간 만에 접종 물량이 소진됐다며 예약을 마감했습니다. 정부가 확보한 백신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대상자 절반쯤이 1차로 맞을 분량만을 확보해 놓고, 그런 사실도 밝히지 않은 채 덜컥 예약 접수에 나섰습니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접종 대상자들이 밤을 새고 새벽잠을 설쳤습니다. 그러고도 예약을 못 한 분들은 길 가다가 느닷없이 뺨 맞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가요.
그래 놓고는, 누가 봐도 뻔히 예상됐던 상황을 "미처 판단 못했다"고 하는 걸 보면, 모더나 확보 실태를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이 생산회사 CEO와 화상통화까지 하며 2천만명분 도입을 2분기로 앞당겼다고 홍보했던 바로 그 모더나입니다.
그렇듯 백신 공백으로 1차 접종률이 30퍼센트에 정체된 사이, 확진자는 두 배로 뛰는 '더블링'을 했고, 델타 변이는 국내 신규 변이의 70퍼센트에 이르렀습니다.
대통령이 말한 '짧고 굵은 타개'가 가능할지 역시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열대야처럼 답답한 나날은 이어지고, 마스크 사려고 줄을 섰던 국민은, 검사 받느라 줄 서고, 황당한 선착순 예약 하느라 줄을 서더니, 이제 또 무슨 줄을 서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7월 13일 앵커의 시선은 '줄을 서시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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