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국민의힘 예비후보가 1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공정개혁포럼' 창립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공정개혁포럼은 윤 후보를 지지하는 인사들의 외곽조직이다. / 조선일보DB
2주전쯤 한 국민의힘 중진 의원이 TV조선 기자들에게 한 발언이다. '공식'인지 '비공식'인지 애매한 자리에서 만난 그는 '8월말'이란 정리 시한까지 확신하는 자신감을 보였다.
"8월말 되면 알 수 있습니다. 두고 보세요."
지금은 꽤 '정리'가 됐지만, 그날은 이준석 대표가 '저거 곧 정리된다'고 말했다는 대상이 '윤석열'인지 '당내 갈등'인지를 놓고 당이 둘로 쪼개질 것처럼 난타전을 벌일 때였다. '토론 두 번이면 윤석열은 정리된다'는 진위와 출처가 불명한 말도 떠돌았다.
'정리'란 표현에 극도의 예민함이 더해진 시기에, 그것도 대선경선 판도에 영향을 줄만한 당의 핵심 중진 인사가 '윤석열은 곧 정리된다'는 말을 가감없이 하는 의도나 배경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미 '쥴리', '주가조작 의혹', '장모 구속', '세무서장 뇌물 의혹' 등 갖가지 'X파일'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대부분 '결정타'로 보기엔 부족한 쟁점들이었다.
여러 경로를 취재한 결과 그가 자신한 '윤석열 정리설'의 행간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포착됐다. 바로 지병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중이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흘러나오는 시나리오는 간단했다. '건강 상황이 심각하다'는 박 전 대통령이 '형집행정지'를 신청하고, 검찰의 판단에 따라 출옥을 하게 되면, '윤석열의 검찰은 풀어주지 않았던 박근혜가 윤석열 없는 검찰을 통해 풀려났다'는 여론이 퍼지고, 결국 윤석열의 핵심 지지 기반인 TK(대구·경북) 지지율부터 무너져 대세론이 꺾인다는 그럴듯한 구상이었다.
2017년 1월 서울 강남구의 '박근혜-최순실 특검' 사무실에 윤석열 수사팀장이 출근하는 모습. / 조선일보DB
■ 尹, 朴 형집행정지 2회 불허
2019년 4월 박 전 대통령은 허리디스크 통증 등을 호소하며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다. 형사소송법 471조는 '현저히 건강을 해하거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을 염려가 있는 때' 형 집행을 정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당시 건강상태를 임검(臨檢·현장조사)한 서울중앙지검은 심의위원회를 열어 '수형생활이 불가능한 건강 수준'은 아니라며 불허 결정을 내렸다. 이 심의 결과를 보고 받고 최종 결재한 당사자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같은해 9월 다시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다. 똑같이 건강상의 이유를 제시했고, 검찰은 구치소를 찾아가 임검 절차를 거쳤으며, 이를 판단할 심의위원회가 열렸고, 결과는 또 불허였다. 달라진 건 5개월 전 불허 결정을 한 윤석열 중앙지검장이 그 사이 검찰총장으로 영전했다는 차이뿐이었다.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는 "'윤석열 검찰'로부터 두 차례 불허가 된 후 박 전 대통령 스스로 먼저 형집행정지 신청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며 "그러나 이후 2년째 사면이 안 된데다 건강 상태가 워낙 안 좋기 때문에 이제는 형집행정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오랫동안 박 전 대통령 편에 서왔던 조 대표 외에 형집행정지를 강하게 주장한 야권의 주요인물이 또 한 사람 있는데, 바로 홍준표 후보다.
그는 지난달 8일 SNS에 "지난주 정부 인사와 만나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형집행정지를 요청했다"며 "8·15를 넘기면 이제 그 문제는 문 정권이 끌려가는 입장이 되니 정국 주도권을 갖고 있을 때 대화합 조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형집행정지로 윤 후보가 타격을 받을 경우, 각 후보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결국 가장 큰 반사이익을 얻는 쪽은 홍 후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성모병원에서 퇴원하는 모습이 TV조선 카메라에 단독으로 포착됐다.
■ 대선과 '박근혜 변수'
'박근혜'란 이름 석자는 지난 십수년 동안 각종 선거의 유력 변수였다.
2004년 '선거의 여왕'이 등장한 후 전국 단위 선거 때마다 선거판을 흔들었고, 2013년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 당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대통령이 된 이후엔 '진박 감별'이나 '탄핵 국면' 등 패인으로 작용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 자체도 '큰 변수'임에는 변함이 없다.
옥중에서도 여당 차기대권 판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까지 범여권 선두를 지켜오던 이낙연 후보가 올해 신년 벽두에 느닷없이 '사면론'을 꺼내들었다 곧바로 접었는데, 친문 핵심지지층이 대거 돌아서면서 지지율 하락세와 역전구도까지 이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야권에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박근혜 변수'가 사실상 무력화한 기점을 지난 4월 보궐선거로 꼽는 의견이 있다. LH 투기 사태가 선거판을 초반부터 뒤흔들었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생태탕 진실공방'이 이어지면서 '친박'이나 '탄핵'과 같은 요인이 힘을 쓸 틈 자체가 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형집행정지 가능성도 일단 지난달 20일 퇴원과 함께 다시 수그러든 상태다. 입원 한 달 만에 병원을 떠나는 그의 얼굴은 다소 부어있었지만, 겉모습으로만 보면 여의도의 뜬소문처럼 '몰골이 말이 아닐 정도로' 심각해보이진 않았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과 내년 3월 대선에서 '박근혜'란 이름 석자가 또 다시 선거판을 흔들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유력 야권주자가 전직 대통령 수사 당사자란 역설적 정세는 어느 정도 '거리두기' 중인 박근혜·윤석열 두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을 태세다. 숙적(宿敵)이 정적(政敵)으로 바뀌는 순간, '탄핵의 강'은 다시 범람한다.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비전발표회에 참석한 윤석열(왼쪽)·홍준표 대선 예비후보. / 조선일보DB
■ 洪, '尹 적폐수사'에 집중공세
최근 여론 상승세를 탄 홍준표 후보는 '윤석열 검찰의 적폐수사'를 집중 거론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12일 SNS에 "윤 후보가 문 정권 선봉에서 적폐수사로 우리 진영을 궤멸시킬 때 매일 지켜보며 우리 진영 사람들이 차례로 끌려가 직권남용이란 정치적 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감옥 가는 것을 가슴 아프게 바라봤다"며 '부역' '점령군' 등 표현으로 윤 후보를 정면 겨냥했다.
지난 1일 윤·홍 두 후보 사이에 뜬금없이 '두테르테 설전'이 빚어졌을 때도 홍 후보는 곧바로 "벼락출세한 보답으로 득달같이 특수4부까지 동원, 1000여명을 무차별 수사해 200여명을 구속하고 5명을 자살케 한 분"이라며 윤 후보를 압박했다.
이러한 공세는 여전히 야권의 핵심세력으로 꼽히는 박 전 대통령 지지층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윤석열은 배신자'란 인식까지 각인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홍 후보는 지난달 27일 "가장 혐오하는 부류는 배신자들"이라며 "한번 배신해본 사람은 언제나 또 배신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홍 후보가 배신자로 지목한 경쟁자가 유승민인지 윤석열인지 해석이 분분하자, 홍 후보 측 대변인이 정식 공지를 통해 "현 정권에 발탁되고 중용받은 분들"이라고 부연 설명을 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윤석열·최재형 두 후보를 겨냥했다는 뜻이다.
인터넷 매체 '뉴스버스'가 "'윤석열 검찰'이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유시민·최강욱·황희석 등 여권인사에 대한 고발을 국민의힘에 사주했다"고 보도하며 공개한 고발장 일부. / 뉴스버스
■ 9월초 터진 '청부고발' 의혹
핵심 중진 의원이 예고했던 '8월말 정리설'은 일단 시기상으론 물건너간 셈이 됐다. 대신 9월초가 되자 '청부 고발 의혹'이란 새로운 악재가 던져졌다. 윤석열 총장 시절 검찰이 여권에 형사고발을 사주했다는 '뉴스버스' 보도가 발단이었다.
윤 후보는 "권언 정치공작을 한두 번 겪었느냐"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민주당은 즉각 '국기문란'이란 공세와 함께 법사위 소집과 출석을 주장하며 확전에 나섰다. 김오수 검찰총장도 즉각 진상조사를, 박범계 법무장관은 사실확인을 지시했다. 여권은 물론 야권의 경쟁주자들도 일제히 가세해 '진실규명'과 '직접해명'을 압박했다.
여야가 서로를 향해 '정치공작'이라며 난타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의혹의 핵심고리인 '고발장 전달자'(손준성)와 '지시자'(윤석열)의 구체적인 관계가 제대로 입증되지 않을 경우 거센 공방만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각종 반론을 잠재울 명확한 사실관계가 드러난다면 윤 후보에겐 이른바 '정리' 수준에 가까운 치명타가 될 전망이다. 많은 이들이 첫 기사를 내놓은 매체의 후속보도를 주목하는 이유다.
'쥴리' '장모' 등 '가족 리스크'에 이어 등장한 '청부고발' 의혹으로 윤석열은 또 다시 검증대에 섰다. 호된 공세에 기세가 꺾일지, 아니면 흔들림없는 대세론을 유지할지는 다음주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날 테다.
■ '정리하느냐, 정리되느냐'
당내 집중 견제는 선두주자의 숙명이다. 현재 야권의 대다수 주자들은 '윤석열이 정리되면' 자신이 대안으로 급부상한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1대10'의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오죽했으면 "홍준표가 윤석열을 잡고, 유승민이 홍준표를 잡는다"는 '다단계 정리론'까지 나왔다.
정리를 할지, 정리를 당할지는 결국 윤석열 본인에게 달렸다. '청부 고발 의혹'이란 위기를 어느 정도 넘긴다고 해도, 한국 정치사에 유례없는 출신배경을 가진 대선주자인 만큼 앞으로도 도처가 지뢰밭과 같을 것이다. 시한폭탄과 같은 '박근혜 변수'도 그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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