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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동욱 앵커의 시선] 가을이 사라졌다

등록 2021.10.19 21:49 / 수정 2021.10.19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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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세상이여. 그대를 품을 수 없구나. 그대의 바람, 그대의 광활한 잿빛 하늘을! 피어오르는 그대의 안개를!"

시한부 삶을 사는 여주인공이 가을을 찬미하는 시를 읊습니다. 새소리, 바람소리 가득한 마지막 가을 속을 거닐며 신에게 경배합니다.

'뉴욕의 가을'은, 두 연인이 우연히 재회한 이 가을에선 재즈곡으로 흐릅니다.

가을은 하도 아름다워서 너무 짧습니다. 여름이 가고 나서도 한참을 머뭇거리다, 이내 늦가을 햇살이 여려지면서 겨울이 오곤 하지요. 가을은 느릿한 안단테로 왔다가 알레그레토, 알레그로, 그리고 마침내 비바체로 휩쓸려갑니다. 문득 왔다 쏜살같이 달아납니다.

"물이고 가랑잎이고, 가을엔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가을은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달리고, 우리는 비명처럼 있습니다"

시인은 추운 밤 풍경에 '가을'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널어놓은 빨래가 밤비에 젖고 있다. 아아 추워라" 

시월이 되도록 끈질기게 버티던 늦더위와 모기가, 추적추적 가을비에 물러가나 싶더니, 느닷없이 겨울이 왔습니다.

새벽시장 상인들은 귀마개까지 하고도 모자라 모닥불로 추위를 녹여봅니다.

한라산엔 상고대가 서리고 오늘 설악산엔 첫눈이 내렸습니다. 가을이 아예 실종돼버린 걸까요. 그러지 않아도 가을은 가장 짧은 계절이었습니다.

지난 10년 평균이 64일, 두 달 사흘밖에 안 됩니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도, 오랜 세월 가을이던 게, 재작년 봄에게 밀려났습니다.

십억 백억 천억이 푼돈이라도 되는 듯 입에 오르내리는 세상입니다. 정치는 또 삿대질 드잡이질로 날을 지새는 세상에, 마음 둘 곳 몰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분노 우울 허탈 허무 자조 무기력… 집단 트라우마가 따로 없습니다. 가뜩이나 스산한 이즈음에, 잠시 숨을 고르고 아우르고 북돋우는 가을마저 간 곳이 없습니다.

시인이 짧은 가을을 애도하며 시린 가슴들을 어루만집니다.

"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너나 나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우리에게 언제 그 풍요롭고 넉넉한 가을이 있었던가요? 세상이 갈라지고 쪼개져, 부대끼고 으르렁댈지언정, 함께 사는 우리라도 젖은 눈으로 서로 보듬어야겠습니다.

칼바람 부는 겨울이 더 닥치기 전에 10월 19일 앵커의 시선은 '가을이 사라졌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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