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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동욱 앵커의 시선] 괜찮다

등록 2021.10.21 21:51 / 수정 2021.10.2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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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아이가 전시실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린 작품에 올라탑니다. 미끄럼을 타듯 무릎으로 문지르다 드러눕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말리기는커녕 사진을 찍어줍니다.

보험 평가액만 1억원이 넘는 대작은 글씨가 뭉개지고 손자국 발자국이 찍혔습니다. 미술관 사람들이 아이 부모를 찾아냈지만 정작 일흔여섯 살 한국화 대가는 "아무 문제도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도 손주들이 있는데, 무럭무럭 크는 아이들이 무언들 못하겠느냐"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말기 췌장암 선고를 받고서 시인의 아버지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살 만큼 살았다"며 항암치료도 마다했습니다.

몸이 새뼈 마냥 삭아내린 날, 아버지는 모처럼 죽 한 그릇을 다 비우더니 남몰래 영안실에 내려갔다 오셨습니다. 손짓으로 아들을 불러 젖은 침대 시트 밑에서 더듬더듬 무얼 하나 꺼내 주시는 거였습니다. 겉장이 너덜너덜한 장례비 적금통장이었습니다.

얼마 전 백신을 맞은 뒤 뇌출혈로 숨진 일흔세 살 어머니의 사연을, 아들이 청와대 청원에 올렸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고 호소하면서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선물'을 이야기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던 아들은 어머니 지인으로부터 유언 아닌 유언을 전해 들었습니다.

"백만 원을 숨겨놓았으니 만일 내가 잘못되면 아들에게 꼭 알려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옷장 속 아버지 영정사진 밑에서 돈봉투를 찾아낸 가족은 울음바다가 됐다고 합니다.

아들은 "한 달에 10만원씩 드린 용돈으로 애들 간식 사주며 남은 돈을 모으셨던 모양" 이라고 했습니다.

애틋하고도 따스해서 초겨울 한기가 녹는 듯합니다. 

어느 젊은 엄마는, 아이가 병원에 있다 퇴원한 뒤로 자주 쿵쾅거리고 친구들과 시끄럽게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

마침 친정에서 보내준 감을 감사 편지와 함께 들고 아래층 할아버지를 뵈러 갔습니다. 늘 "애들은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하시는 분이었지요. 집에 안 계셔서 문 앞에 두고 왔더니 며칠 뒤 집 앞에 푸짐한 빵과 함께 손 편지가 있었습니다.

"혼자 외롭게 사는 늙은이에게는 시끄러움도 위안이 된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배려할 줄도, 인내할 줄도 모르는 성마른 세상에서, 슬기롭고도 인간미 넘치는 노인의 품격이 빛나는 순간입니다.

오래될수록 맛이 깊어지는 와인처럼, 사람의 향기가 깊어지는 현자의 모습에서 큰 위안을 얻습니다. 저도 그렇게 늙어갈 수 있을까요?

10월 21일 앵커의 시선은 '괜찮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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