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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동욱 앵커의 시선] 설, 다시 기다림

등록 2022.01.28 21:52 / 수정 2022.01.2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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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날 나는 엄마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간다…"

시인 백석이 구수한 서북 토속어로 풀어낸 설 서사 '여우난골족'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여우가 출몰하는 '골짜기에 사는' 일가 피붙이 수십 명이 큰댁에 왁자하게 모여듭니다.

방 안에는 명절 새 옷 냄새, 인절미 송기떡 콩가루 찰떡 냄새가 가득합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몰려다니며 갖은 놀이를 하다 설날 새벽녘이 돼서야, 지쳐 잠이 듭니다. 시누이 동서들이 분주한 아침 부엌에서 무새우국 끓이는 냄새가 문틈으로 새 들어와 깨울 때까지 잡니다.

백석이 판소리 사설 같은 운율로 재현해낸, 백 년 전 유년의 설 풍경은, 우리 명절의 정서가 설렘과 푸근함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웁니다.

그때처럼 왁자지껄하진 않아도, 바삐 살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은 한잔 술로 핏줄의 온기를 나눕니다.

시인은 다 큰 아들에게 술 권하는 설날 아침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자식도 크면 친구 되지. 자 너도 한 잔 받아라. 잔디 줄기처럼 서로 엉기면, 눈물 날 듯이 푸근하구나" 

지난해 설을 앞두고 여기저기 내걸렸던 현수막들입니다.

"우리 우리 설날은 내년이래요” "우리 올해 설은 만나지 말고" "올 설에는 어디 댕기지 말고 내년 설에 마카모예(모두 모여)!"

그런데 해가 한 바퀴 꼬박 돌아 설이 다시 왔지만 또 다시 내년 설을 기약하는 현수막들이 나붙었습니다. 설이 따스한 것은 가족이 있어서인데, 만남 대신 흩어짐을 권하는 명절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길고 긴 코로나의 터널에 갇혀 사느라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부모 자식 모두 명절의 갈증도 오래 쌓였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역병의 기세가 질기고도 무섭습니다. 며칠 사이 무섭게 번지고 있는 오미크론을 생각하면 부모님들부터 손을 내저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돼버렸습니다.

그래도 어딘가 돌아갈 곳이 있고, 누군가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입니다.

그렇게 지금 지닌 것의 소중함은, 그것이 멀어진 뒤에 더욱더 절절하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립고 고마운 부모님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설은 푸근합니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는 설날 명시처럼 말입니다.

1월 28일 앵커의 시선은 '설, 다시 기다림'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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