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Talk] 취지 퇴색한 '소셜믹스'…임대동 주민, 아파트 편의시설 이용 금지 '여전'
등록: 2022.06.20 12:58
수정: 2022.06.20 16:49
■소셜 믹스와 차별
2013년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
객실 승차권이 1등, 2등, 3등, 꼬리칸까지 계급으로 나뉜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은 열차의 맨 뒤쪽 꼬리칸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은 앞쪽 칸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다.
이들은 모두 같은 열차를 타고 있지만 이용할 수 있는 시설과 서비스의 질이 완전히 다르다.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영화 '설국열차'가 오버랩되는 제보를 받았다.
분양가구와 임대가구가 혼합된 단지인데, 헬스장이나 북카페 등 아파트 편의시설은 분양동 주민만 이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임대가구라는 이유만으로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는 황당한 말에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임대주택 주민들이 많이 활동하는 한 인터넷 카페에 먼저 접속해 봤다.
아파트 공용 편의시설을 이용하지 못해 불만을 호소하는 게시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게시물을 쓴 작성자에게 취재기자 신분을 밝히며 쪽지와 이메일을 보냈지만 '읽음' 표시만 남아 있었고 답장은 없었다.
■임대동 주민의 서러움
직접 해당 아파트를 찾아가 취재해보기로 했다.
서울의 분양과 임대 혼합 단지는 300여 곳.
차별 문제가 불거진 서울 용산구에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찾아갔다. 전체 세대수는 1100세대에 달한다.
이 아파트의 임대동 주민은 190여 세대였다.
공용 현관문 근처에서 기다리다 만난 임대동 입주민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봤다.
같은 아파트 단지, 심지어 같은 동에 살아도 3층에 있는 헬스장 등 공용 편의시설은 분양동 주민들만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혼부부로 재작년에 입주한 30대 임대동 주민은 "임대세대 주민들은 헬스장 등 커뮤니티 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공고문이 붙어있다"면서 "어쩔 수 없이 아파트 외부에 있는 헬스장을 이용하고 있다"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다른 임대동 주민들도 비슷한 얘기를 털어놨다.
SH공사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항의도 하고, 여러 번 문제를 제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분양동 주민들을 만나봤다.
분양동 주민들의 속내는 복잡해 보였다. 이기주의와 차별 문제로 비춰질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였다.
한 분양동 주민은 "2달 전에 임대동 주민들 사이에서 투표가 있었는데 커뮤니티 시설 이용을 원치 않은 주민들이 더 많이 나왔다"며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취재진은 아파트 공용 편의시설을 이용하고 싶은 임대동 주민에게만 사용료를 걷으면 문제가 없지 않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분양동 주민들은 형평성을 이유로 반대했다.
분양 세대도 이용 여부와 관계없이 공동 분담금을 걷고 있는데 임대동 주민에게만 예외를 허용해주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임대동 주민의 의사결정 '소외’
임대사업자인 SH공사의 입장이 궁금했다.
SH공사는 임대사업자로서 분양 세대를 대표하는 입주자대표회의와 함께 혼합단지의 관리에 관한 의사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SH공사를 취재하고 현행 법규정을 찾아보면서 SH공사에게는 이렇다할 권한이 없다는 걸 느꼈다.
현행법상 SH공사가 아파트 편의시설 이용 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입주자대표회의에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혼합단지 운영 등에 관한 관련 규정이 분양 주민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을 보면 입주자대표회의와 임대사업자(SH공사)가 혼합단지 관리에 관한 사항을 함께 결정할 수 있되, 상호 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혼합주택단지 공급면적의 2분의 1, 혹은 3분의 2 이상을 관리하는 측이 결정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혼합단지에서 공급면적이 넓은 쪽은 대부분 분양아파트 단지이다.
공용 편의시설 이용을 둘러싸고 SH공사와 입주자대표회의 간에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의사결정의 최종적인 권한은 입주자대표회의가 갖게 된다.
게다가 임대주택 거주자로 구성된 임차인대표회의는 혼합단지 관리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에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임대동 주민들은 입주자대표회의에 참여할 수 없고, 의사결정에도 개입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SH공사도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주자대표회의에 임차인의 편의시설 이용 보장을 요구하고 표준준칙도 만들어 배포했지만 분양동 주민들이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분양동 주민의 의사에 따라 임대동 주민의 아파트 편의시설 이용 권한이 결정되는 구조인 셈이다.
혼합단지 운영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는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고는 커뮤니티 시설 이용을 둘러싼 차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소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제도적 미비와 소극적인 주무부처
그렇다면 소셜믹스 정책을 입안하는 행정기관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서울시의 주무부서인 주택정책실도 이런 제도적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올해 4월 뒤늦게 임대주택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3대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완전한 소셜믹스 실현을 위한 방안으로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 요구도 있었다.
다만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은 국토교통부 소관이라, 서울시는 지난 4월 국토부에 시행령 개정을 요청했다.
입주자대표회의에 임대주택 임차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시행령을 바꾸자고 정식으로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국토부는 시행령 개정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시행령 개정 검토를 위해 연구용역 발주를 준비 중이었지만 시행령 개정에 부정적인 입장이 감지됐다.
공동주택관리법이 분양 받은 공동주택 입주민들의 의결권 행사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법률인데, 임대주택 임차인의 참여권을 명시하는 게 입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임대주택 임차인의 권리는 민간임대주택법에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임차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에도 임차인들이 분양세대 주민과 협의할 사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임대주택 임차인의 참여권 보장을 위한 법률이 없는 상황에서 주무 부처인 국토부는 손을 놓고 있거나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 모양새로 비춰졌다.
■공직사회 '보신주의' 넘어서야 문제 해결
아파트 공용 편의시설 차별 문제는 제도적 보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어렵다.
유관 부처인 서울시, SH공사, 국토부, 국회까지 나서서 함께 논의를 하며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부처 간에 서로 책임공방만 하고 떠넘기기로 일관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선거 공약처럼 고품격 임대주택을 많이 공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고품격 임대주택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차별과 소외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섬세한 정책적 배려도 필요한 시점이다.
'내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해주겠지'라는 공직사회 특유의 보신주의에 가로막힌다면 해결은커녕 문제가 오히려 악화된다.
유관 부서들이 자신들의 문제라는 절박함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며 공직자 본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공무원은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공복(公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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