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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취재후 Talk] 이건희가 이중섭을 사랑한 이유?

등록 2022.08.18 12:38 / 수정 2022.08.1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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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몰랐던 '국민화가' 이중섭의 이야기

이중섭 /조선일보DB

■이건희가 사랑한 '국민화가' 이중섭

"지금까지 당신이 무엇을 수집했는지 알려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벨기에 출신 미술 수집가 장 빌리 메스타슈(Jean Willy Mestach)의 말이다. 수집가가 시간과 돈을 들여 정성껏 모은 수집품에서 그 사람의 세계관과 안목을 가늠할 수 있다는 뜻이다.

8월 12일부터 내년 4월 2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이 열린다. 총 97점에 달하는 이중섭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故 이건희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1488점 가운데 이중섭 작품은 104점. 국내외 작가를 통틀어 유영국(187점)과 파블로 피카소(112점)에 이어 세번째로 많다. 유영국, 피카소 작품 대부분이 도자와 판화임을 고려하면 이중섭은 그림(회화 및 드로잉)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중섭은 지난 2004년 삼성이 심혈을 기울여 개관한 리움 미술관(Leeum) 첫 전시의 주인공이다. 리움은 2005년 5월 이중섭 작품을 중심으로 '이중섭 드로잉: 그리움의 편린들'을 선보였다. 고미술품부터 근현대 미술품까지 폭넓게 다루며 세간의 주목을 받은 리움이 선택한 첫 작가라는 사실만으로도 이중섭에 대한 삼성의 애정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이 평생을 공들여 수집했던 작가 이중섭. 이중섭의 어떤 점이 대한민국 1등 기업 총수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MoMA가 먼저 알아본 이중섭의 시그니처 '은지화'

MoMa 소장 이중섭 은지화 <신문보는 사람들> 1950년대 전반


'은지화'는 가난한 화가였던 이중섭이 종이와 캔버스 살 돈이 없어 버려진 양담배를 주워 담뱃갑 속 은박지를 화폭 삼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황소' 연작과 함께 이중섭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대중들 마음 속에 '이중섭'하면 떠오르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은박지에 못이나 송곳, 펜 꼭지처럼 끝이 날카로운 소재로 그림을 그려 흑갈색 안료나 물감을 칠한 뒤 다시 닦아내는 '상감기법'으로 완성한 작품들. 겨우 손바닥 남짓한 작은 은지 속에 이중섭 작품 세계의 정수가 담겨 있다.

우리보다 먼저, 미국이 은지화의 가치를 알아봤다. 그것도 이중섭 생전에. 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이중섭의 작품 대다수와 그의 작품 세계는 사후에 더 인정받았다. 하지만 은지화는 그가 살아있던 1950년대에 '모마(MoMA)'로 불리는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으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MoMa 소장 이중섭 은지화 <복숭아 밭에서 노는 아이들(어린이와 도원) 1950년대 전반


주한 미국 대사관 소속 문화담당관이자 대구 미공보원장을 지낸 아서 맥타카트(Arthur McTaggart)라는 인물이 있다. 1955년 1월, 당시 서울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에서 작품을 보고 감명 받은 맥타카트는 은지화 3점을 구매한다. 이후 미국에 돌아가 이를 모마에 기부했다. 모마는 이중섭 은지화만의 독특한 제작기법과 재료, 작품성을 인정해 1956년 이사회 의결을 거쳐 공식 소장하게 된다.

이는 아시아 화가의 첫 모마 입성으로 알려졌다. 1950년대 변방의 작은 나라이자 전쟁국가였던 한국 작가의 그림이 서양미술의 1번지에 입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모마가 소장한 이중섭의 은지화 3점은 1950년에서 1952년 사이 제작된 <복숭아 밭에서 노는 아이들(어린이와 도원)>, <도원(낙원의 가족)>, <신문을 보는 사람들> 이다. 1999년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기념전에서 복사물 형태로만 공개됐었다.

지난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덕수궁에서 열린 '이중섭 100년의 신화' 전시를 위해 모마에서 대여해오면서 60년만에 한국 관람객을 만났다.

MoMa 소장 이중섭 은지화 <도원(낙원의 가족)> 1950년대 전반


■미완성의 꿈, 이중섭 예술혼의 정수 '은지화'

1952년부터 1956년 죽기 전까지, 가족과 떨어져 지낸 이중섭은 딱 한 번 가족을 만났었다. 1953년 7월 하순 쯤, 절친했던 시인 구상이 구해준 선원증으로 어렵게 일본 도쿄에 머무는 가족을 일주일간 방문했을 때이다.

당시 이중섭은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은지화 뭉치를 건넸다.은지화 70여 점을 뭉터기로 쥐어주며 아내에게 "나중에 대작을 만들기 위한 에스키스(밑그림)이니 잘 보관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이중섭의 은지화는 확인된 것만 142점. 하지만 이중섭과 막역한 친구였던 구상은 은지화가 무려 300여 점에 달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수많은 조각퍼즐 한 조각, 한 조각이 모여 마침내 큰 퍼즐을 완성하듯, 작은 은지화 한 점, 한 점은 언젠가 대작을 완성시키고픈 작가의 오랜 염원이자 꿈이었으리라.

비록 꿈꾸던 거대한 초대형 작품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은지화는 이중섭 예술사에 빼놓을 수 없는 정수로 남았다. 단 3점 뿐이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중섭 은지화는 이건희 회장 기증으로 30점으로 늘면서 이번에 27점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게 됐다.

특히, 가족과 상봉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는 자화상을 은지화로 담은 <가족을 그리는 화가>를 감상해보길 권한다.

은지화 〈가족을 그리는 화가〉, 1950년대 전반, 15.2×8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가족을 그리는 화가> 1950년대

작품 속엔 두 명의 이중섭이 등장한다. 콧수염을 기른 긴 얼굴의 남성이 이중섭인데, 한 명은 그림 하단에서 오른손에 붓을 들고 다리를 벌린 채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붓을 쥔 이중섭이 그리는 것은 두 아들, 아내와 상봉해 이들을 끌어안고 있는 자기 자신, 또 다른 이중섭이다.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한 재회의 소망이 오롯이 느껴진다.


■인간 이중섭과 예술가 이중섭의 '사랑'

예술가 이중섭의 작품 세계와 인간 이중섭의 생은 일치한다. 이중섭이 즐겨 그린 인물과 소재, 풍경은 41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명제는 '사랑'이다.

대중에게 익숙한 이중섭만의 화법과 스타일이 완성되기 전 그려진 1940년대 초기작 연필화에도 훗날 아내가 된 마사코가 등장한다. 결혼 전 장거리 연애시절 마사코와 주고받은 엽서에 그린 그림들은 이중섭표 러브레터 그 자체이다. 이번에 공개된 엽서화 37점에 찍힌 우체국 소인으로 정확한 연도와 날짜도 알 수 있다.


<춤추는 가족〉(1950년대 전반)

1951년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며 홀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작가의 애틋한 사랑은 작품마다 짙게 베어 있다. 그의 그림에 아내와 두 아들 모습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네 식구가 서로 부등켜 안고 있거나, 손잡고 나체로 춤을 추기도 하고, 배를 타고 먼 바다 건너 꿈에 그리던 가족과 만나는 상상을 화폭에 담았다. 가족과의 재회는 죽을 때까지 이어진 작가의 바람이었다.


<현해탄> (1950년대 전반)

이중섭이 같은 그림을 반복해 그린 배경에는 두 아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숨어 있다.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보낸 두 아들에게 그림을 그려 선물했는데, 혹여 두 아들이 싸울까봐 똑같은 그림을 2점씩 그려 한쪽 귀퉁이에 '태현군(첫째 아들)','태성군(둘째 아들)' 이라고 적어 보냈다. 전시장에서 같은 제목의 똑 닮은 아이와 게 그림을 나란히 감상할 수 있다.

(왼쪽)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전반, 32.8×20.3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오른쪽)〈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1950년대, 25.8×19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1950년대)

소와 닭, 게, 물고기, 새는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특히 게는 가족과 제주도에 머물 당시 두 아들과 게를 잡고 놀던 시절을 떠올리며 즐겨 그렸다. 먹을 것이 없어 해변에서 뜯어온 해초와 게를 잡아 먹으며 연명했지만 그의 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꼽힌다.

편지화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 , 26.5×2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

손으로 꾹 꾹 눌러쓴 글씨에 여백은 그림으로 채워 아내에게 부친 손편지. 국립현대미술관 벽에 걸린 액자 속 편지화엔 아내를 향한 이중섭의 절절한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단칸방을 전전하며 먹을 것 없이, 화구나 마땅한 재료 없이도 그릴 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주워 그리고 또 그렸던 사람. 외로움에 눈물 삼키고 배고픔을 견디면서도 부단히도 그리고 또 그렸던 이유. 언젠가 다시 만날 가족과의 재회만을 동력 삼아 완성시킨 그의 작품들은 전쟁이라는 절박하고 힘겨운 시기, 혼을 담아 그림 속에 박제시킨 가족을 향한 이중섭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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