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사회

[신동욱 앵커의 시선] 책에서 길을 찾다

등록 2022.11.29 21:50 / 수정 2022.11.30 20:18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중세 수도원 도서관에 들어간 젊은 수련사가 감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책들이 서로 대화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수 세기에 걸친 속삭임, 만들고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남는 비밀의 보고였습니다"

그 독백은 작가 에코의 독백이기도 했습니다.

에코는 책 5만 권을 지녔던 장서가이자 독서광이었습니다. 집 서재에 들어선 그가 미로 같은 책장 사이를 몇 번이나 돌고 돌아, 찾던 책을 집어 듭니다.

그는 책에서 섭렵한 방대한 지식들로 스스로를 채운 도서관 그 자체였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지닌 것을 모두 버려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책더미 속에서 죽겠다"고 했지요.

한국인에게 한국을 깨우쳐준 기자 이규태의 집 지하실은 책 만5천 권이 들어찬 '한국학 벙커' 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뜨기 앞서 "저 책들을 누군가 활용해줘야 할 텐데"라며 애를 태웠답니다.

그가 남긴 책 중에 절반, 7천여 권은 모교 연세대가 '이규태 문고'를 꾸려 소장하고 있습니다.

고인이 알면 서운해할 일이지만 요즘 책이 겪는 수난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베이비 부머 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평생 책을 가까이해온 애서가들이 책을 처리하느라 쩔쩔맨다고 합니다.

공공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들이 더는 책을 둘 곳이 없어서 기증받는 책을 '발간된 지 5년 이하'로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전국 도서관에서 폐기되는 책도 백 65만 권까지 늘어났다고 합니다.

헌책방도 손님이 크게 줄자 헌책도 가려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헌책의 요람이었던 청계천 헌책방거리만 해도 20여 년 전 백 곳을 넘던 게 이제 열일곱 곳만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독서인구가 갈수록 주는 데다 그나마 전자책과 오디오 북에게 시장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마존 CEO 베이조스가 "책은 죽지 않는다. 다만 디지털화할 뿐" 이라고 한 게 실감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매끈한 디지털이 영원히 흉내내지 못할 것들이 있습니다.

책장이 접히고, 밑줄 치고, 메모하고, 갈피엔 클로버 눌린 자국, 표지엔 세월에 바랜 흔적 그리고 쿰쿰한 책 냄새…. 책에는, 책장을 넘기며 울고 웃고 가슴 뛰던 그때 그 삶의 체온이 스며 있습니다.

그런 책을 차마 어떻게 종이 쓰레기로 배출할 수가 있을까요. 저 역시 이사할 때마다 한 무더기씩 책을 내다 버리는 게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한해의 끝을 바라보면서 뭔가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책이 포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이책은 영원하다"고 단언했던 움베르토 에코를 믿고서 말이지요.

11월 29일 앵커의 시선은 '책에서 길을 찾다' 였습니다.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보하기